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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탁 시인의 서재에는 시인이 그동안 걸어온 삶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처음 문학을 운명처럼 맞닥뜨린 현대자동차 근로자 시절,  한 두권씩 모았던 세계문학서적들이 한 켠에 있고 또 한 켠에는 그를 아동문학의 길을 걷는데 한 역할을 했던 동시집과 동화책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 조금 옆 다른 책꽂이에는 그가 출판편집인의 삶으로 뛰어들었을 때 보았던 컴퓨터디자인 전문 서적들이 꽂혀있는가 하면 그 위에는 그가 몇년전부터 출판사 일을 하며 손수 제작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책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현장 노동자 시절 우연히 읽은 고전에 감동
28살때 공단 문학 시 부문 최우수상 당선
IMF 명퇴·논술 교사 등 다양한 인생경험
3년전 시작 출판인 삶 위해 끝없이 노력 중

# 거창서 고등학교 졸업후 10년간 현대자동차서 근무

▲ 근로자에서 시인으로, 또 현재는 편집자이자 출판사 경영자로 변신한 유정탁 시인. 그동안 그의 삶이 변화의 장을 맞는 순간마다 그의 서재 속 책도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일 얼마전 울산 중구 서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유정탁(45) 시인의 서재를 찾았다. 유 시인의 서재는 그가 일하는 작가시대라는 출판사 사무실안에 있었는데 그는 최근 이사를 하면서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책들만 이곳에 옮겨뒀다고 했다. 서가를 한 눈에 둘러보니 책들은 모두 신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어디선가 책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나올 듯한 누런 헌 책들이 많았는데, 이책들이 그 동안 그와 수십년간 동고동락해온 사이임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했다.

 시인에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동안 살아온 삶의 전반에 책과 씨름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는데, "언제부터 문학을 접하게 됐냐"는 질문에 그는 예상외로 "늦은 나이에 문학과 만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경남 거창이 고향인 유 시인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울산으로 오게 됐는데 그 후 줄곧 울산에 있으며 현대차에 취업해 십여년을 근로자의 삶을 살았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책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했는데 언젠가 퇴근 후 기숙사방에서 무심코 집어든 책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그는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세계문학책 중의 한 권이었을텐데 그 책이 인연이 돼 그 후 세계문학소설을 독파해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헤르만헤세의 작품에 본능처럼 끌렸다. 이 날 서재에서도 헤세의 <유리알 유희>, <지와 사랑>, <데미안>, <향수> 등 10여권에 달하는 책을 볼 수 있었는데 그는 "모든 책의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 책들을 떠올리면 마음속 깊이 아스라한 뭔가가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이 책들은 대부분 당시 서점이나 공업탑에 있는 헌 책방에서 500원~1000원 정도를 주고 사본 것으로 막상 학교다닐 때는 집에 있는 형 책을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려고 헌책방에 드나들었는데 문학을 시작하면서 내 책을 사기 위해 자주 드나들곤 했다"며 웃었다.

 이렇게 매일 퇴근 후 머리맡에 두고 한 권씩 집어들던 책은 언젠가부터 탑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어느 날 자다가는 머릿속에 문장이 마구 떠다니는 꿈을 꾸기도 했단다. 밤이면 잠들기 전 늘 책들을 보고 잤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렇게 점차 독서량을 늘리던 중, 운명처럼 회사 구내식당에 붙은 현대자동차문학회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됐고 그는 이때 여기에 가입했다. 문학회에서의 글쓰기 시간은 늘 퍽퍽하던 그의 삶에 달콤한 휴식과 같았다. 문학이라면 주로 소설을 떠올렸던 그에게 이곳에서의 문학수업은 시라는 장르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고마운 시간이기도 했다. 매일 떠오르는 소재나 영감을 손바닥만한 공책에 메모하는 습관도 이 때 생겼는데 그는 이 때 공책을 아직도 지니고 있었다. 취재 날 그가 건넨 이 공책에는 어디서 본 좋은 시나 문장부터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좋은 소재거리가 빼곡했다. 그는 당시 이 조그만 공책은 작업복 윗도리 주머니에, 또 바지 주머니에는 작은 시집을 챙겨다니며 틈틈히 쉬는 시간이나 일과를 마칠 때면 시를 읽거나 습작을 하곤 했다고 했다.

# 글쓰기 기본기 익히기 위해 다양한 책읽기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5년, 그가 스물여덟이던 해 큰 기대없이 울산 공단문학 공모전의 시 부문에 작품을 냈고 최고상인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당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 채 노동자로서의 삶의 경험과 애환을 가감없이 드러낸 '똥파리를 닦으며'란 시로 심사위원들에게서 깊은 울림과 시적 언어 선택이 특출나다는 평을 받은 그는 이에 용기를 가지고 시를 쓰는 작업에 더 몰두한다.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중퇴하고 회사에 취업했던 그였기에 부족하게 여겼던 맞춤법, 작법 등 글쓰기의 기본을 익히기 위해 여러 책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들은 지금도 그의 서재에 꽂혀있었다.

 이렇게 일과 문학을 병행하다 IMF의 여파로 그 역시 희망퇴직을 하게 되고 이후에는 쌀 장사를 하다 망하기도 하고, 출판일 등을 병행하며 녹록치 않은 삶의 경험을 하게 됐다. 그는 "이 때 겪었던 삶의 경험들은 당시에는 참 힘들었지만 문학을 하는데는 많은 힘이 된 것 같다"며 "문학은 삶에서 나오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 사람과의 인연과 도리 중요시
그리고 얼마 있다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다년간 해온 독서와 글쓰기 연마 덕분에 논술교사로 취업하게 된 것. 지인의 학원에서 논술교사로 일하다 조금 후 자신의 논술학원을 내며 아이들과 주부들에게 논술을 비롯해 동시와 동화를 7년간 가르쳤다. 특히 이 때 그와 인연을 맺었던 동시를 배웠던 주부들은 지금도 그와 알고지낼 정도로 이 때 그는 이들과 진심으로 교류하며 두터운 정을 쌓았다. 그러면서 사람과 사이의 인연과 도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신조도 생겨나게 됐다.

 그리고 그의 이 신조는 가끔은 남들에게 손해를 볼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오늘도 그를 행복한 이로 살게하는 데 도움이 됐다. 2009년 출판사를 연 뒤 출판의 불모지인 울산에서 출판사 하면 먹고 살기 빠듯하다는 통념을 깨고 지금껏 10여권에 책을 내며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게 된 뒤에도 그는 그동안 소중히 여겨온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 서재에 꽂힌 책들은 (그 책을 읽었다는 전제하에)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유정탁 시인의 서재에 꽂힌 책들 역시 시인이 그 동안 살아온 삶을 얘기해주는 힌트들이 곳곳에 묻어나있다.

# "독서는 지성을 쌓게 만든 인생의 동반자"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책 기획과 편집, 디자인 등 전반적인 책 제작부터 전국적인 판매를 모두 책임지는 출판사인 그의 '작가시대'는 그간 울산문인들의 문인집부터 시집, 동화책, 역사서 등 다양한 책을 출판해오고 있다.

 출판에 대해 일자무식이었던 그가 이렇게 책을 만들고 출판사를 차리게 된 데 역시 그 뒤에는 책의 힘이 있었다. 그의 서재에는 포토샵 최신판 버전의 책부터 일러스트레이트, 책 출판과 관련된 다양한 책이 스무여권 정도 있었는데 그는 보통 컴퓨터 전문서적의 경우 트렌드도 빠르고 가격이 비싸다보니 요즘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 하나 없이 책만보고 배우는 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뭐든 하나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보니 그런데 주구장창 파고들다보면 할 수 있게 되더라"고 했다.

 이처럼 그에게 책은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마다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그에게 부족했던 지식과 기술을 알려줬고, 깊은 세월동안 그윽한 지성을 쌓게 해준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서재는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한가닥 희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날 그의 출판사 사무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가을빛 완연한 햇살의 밝음만큼 어쩌면 더욱 밝았을 그 희망을 그는 서재에 꽂힌 그 많던 책들속에서 찾았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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