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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가 울산을 찾아 언론사 간부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어린시절, 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 찾았던 방어진 앞바다와 장생포 해변의 기억부터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쳐 산업수도로 성장한 울산의 변모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했다. 고래를 처음 봤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도 했다. 말 한마디 마다 울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울산이 선친의 '조국근대화' 열정에 최일선이었다는 점과 그 성과물이 전국 최고의 부자도시로 거듭났다는 사실이 바탕에 깔린 듯했다. 박 후보는 대화의 상당부분을 미래에 할애했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녹색성장과 양질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조적 경제 개념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대권에 나선 후보가 과거나 상대 후보의 문제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모습은 건강했다. 국민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긍정의 에너지를 심어주는 일이야 말로 정치가 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정치부 기자 시절,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취재한 경험이 있다. 현장에서 선거판의 흐름을 읽어가던 시절은 지났지만 유력 대선 후보와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역시 의미 있는 일이다. 직감이라고 할까. 대선에 나선 후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동물적 감각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을 잠시 거꾸로 돌려보자. 지난 1997년 제 15대 대통령 선거전의 기억이다. 당시 선거판은 야권의 김대중 후보와 분열된 여권의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시기였다. 여론조사 우위를 등에 업은 이인제는 경선 불복이라는 낙인을 찍은 채 전국을 누볐다. 그해 8월, 이회창 후보의 아들이 병역의혹에 휩싸이자 여론은 요동쳤다. 대쪽판사 출신 이회창은 정치 신인답지 않게 총리부터 대선후보까지 고속도로를 달렸지만 아들의 병역의혹이 거세지자 속수무책이었다. 그해 8월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인제는 김대중과 이회창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이인제가 탈당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여론조사 때문이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이회창 대세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대중 캠프의 전략가들은 이인제의 등장을 반겼다. '박정희 코스프레'를 한 채 새마을 모자를 쓰고 나타난 이인제가 가능한 대권욕을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완주해 주기를 정화수를 떠 놓고 밤마다 빌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이회창 대세론은 시들고 '필패론'이 무르익을 무렵, 이인제는 김대중과 2강 구도를 형성했다. 바로 그 무렵, 대선 취재 현장에 있는 필자는 운 좋게도 3명의 유력 후보를 단독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었다.

 김대중 후보는 달변가라기 보다는 설득의 달인이다. IMF 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책략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살피는데 방점을 찍었던 모습은 여전히 눈에 선하다. 참모들이 하나의 팀워크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와달리 이인제 후보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 달변가였다. 거침없고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는 작은 호텔방을 쩌렁쩌렁 울렸고'독불장군'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회창 후보였다. 병풍에 대선자금 의혹까지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대세론'에 취해 있었다. 스스로 더럽힌 일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진정성을 갖고 있었다. 병역 의혹이 조작됐거나 대선자금 문제가 부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선거판과 동떨어졌다. 문제는 그 시간이다. 선거가 끝나고 사법기관에서 진실을 밝힌다고 해도 돌아선 민심을 바로 잡진 못한다. 그게 정치다. 정치판을 재판정으로 착각한 순진한 생각이 이회창의 '필패론'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이 정치판의 흐름이다. 박근혜 대세론이 무너진 시점, 안철수가 '정치 백신'을 광고하며 선거판에 나섰다. 추석 민심도 3파전의 예측을 오리무중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야권 후보의 단일화라는 변수가 남았지만 이번 대선은 사실상 이제부터다. 문제는 누가 미래를 향한 새로운 아젠다를 선점하고 이를 구체화하느냐에 있다. 이제 그 과제를 풀 인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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