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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미디어 매체마다 대선 콘텐츠를 다양화하고 있다. 신문마다 대선특집이 줄을 잇고 공중파는 토론 프로그램 대부분이 대선관련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있다. 종편은 한술 더해 매일같이 평론가를 동원해 비슷한 이슈로 별반 다를 것 없는 말잔치를 벌이고 있다. 내용은 없고 변죽만 울리는 말의 성찬이다. 요란한 평론가의 세치 혀는 스스로 각 후보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기에 바쁘다. 도대체 평론인지 대변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토론 프로그램이 연일 전파를 낭비하고 있다. 팩트를 다루는 미디어들이 변죽만 울리는 사이에 대선정국을 타고 한편의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왕이 된 남자를 다룬 가상의 광해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의 팩트는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한 줄의 글이 전부다.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에 내지 말라' 광해군 8년 어느 날 왕은 스스로의 기록을 지웠다. 보름 가까이 사라진 왕의 행적은 무수한 추측을 낳았지만 실록의 책갈피에 묻힌 채 잊혀졌다. 그 사라진 기록이 500년의 시간여행 끝에 충무로에서 되살아났다. 역사 속의 빈 공간은 상상력을 부른다. 패륜과 폭정의 시대로 찍힌 왕의 기록은 더욱 그렇다. 기득권층의 집단 이기주의에 희생된 왕의 평가는 박하다.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사실과 연결해 패륜의 심장, 폭군의 수괴로 만드는 일은 식은 죽먹기다. 그 달콤한 기득권의 논리에 반전을 가한 것이 500년 후의 사라진 광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전반부의 해학과 후반부의 장엄함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 영화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왕의 역사에서 대군이라는 칭호로 남겨진 굴욕적인 왕이다. 아버지 선조의 미움을 받은 왕은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마지막까지 아비의 진정한 마음을 얻지 못한 광해는 통치 기간 내내 아비를 이기고 아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미 광해는 굴욕의 왕 선조와 다른 색깔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성을 버리고 강을 건너 명에 투항하려했던 아비와 달리 분조를 이끈 광해는 변방에서 의병장들을 모집하고 적진의 선두에서 왜군을 호령했다. 점령군 같은 위세를 떨던 명나라 군대 앞에서 조선의 대군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가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은 다분히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왕이 되기 위해 아비의 인정을 받아야 했고 왕이 된 후에는 자리를 지켜줄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전장의 중심에서 백성과 함께 피 땀을 나눈 대군 광해는 왕이 되면서 사라진 셈이다.

 명나라를 자기네 나라 조선보다 더 사랑하고 명나라의 왕을 자신의 왕보다 더 섬기며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신하들은 질책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겁박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저잣거리 왈패인 하선은 구세주였다. 잠시라도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일탈의 안전장치였다. 곤룡포를 벗어던지는 순간 오감을 자극하는 흥분만큼이나 후궁의 향내는 치명적이었다. 은전 스무 냥에 왕의 대역에 나선 하선 역시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언감생심 왕 노릇을 하리라 꿈엔들 생각조차 않았던 하선에게 술판의 분장이 아닌 어엿한 진짜 왕 노릇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보이는 것을 보려고 하는 눈은 살아 있다. 외면하는 눈빛이 아닌 같은 눈높이로 사람을 대하는 왕은 궁인들에게 새롭다. 스스로 자신의 남성을 자르고 궁으로 들어온 처선과 사채로 배불리는 가진 자들에게 아비의 목숨을 잃고 어미와 형제까지 생이별 당한 궁녀 사월이의 이야기는 하선에게 곤룡포를 다시 보게 한다. 그저 은전을 받고 대역이 끝나면 두 배의 은전을 쥐게 될 꿈을 꾼 하선이 은전보다 귀한 것을 얻는 순간이다. 현실 정치에 오만정이 떨어져 후궁의 젖내만 파고들던 진짜 광해와 달리 대동법을 실행하라 명하고 역모에 희생당할 위기에 있던 중전의 오라비를 풀어주라 명한다.

 하선을 찾아 곤룡포를 입힌 도승지 허균은 하선에 대한 하대를 멈춘다. 꼭두각시이거나 그럴듯한 광대쯤으로 여긴 하선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하선이 진짜 왕이 되어가면서 해학은 끝났다. 요란하게 흔들어대던 엉덩이도 현란한 세치 혀도 침묵했다. 시간만 죽이는 항민이 세상을 노려보는 호민으로 바뀌는 순간, 허균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청년 광해가 살아난 셈이다. 광해는 선량한 백성을 부당하게 위협하거나 억울한 희생을 강요한 일은 없다. 경제민주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려했고, 북방의 위협에 맞서 자주국방을 모색했다. 특히 한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명·청 두 나라와 동시에 동맹관계를 맺어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 사라진 광해의 평가가 500년의 세월에 스며들어 젊은 감독과 작가의 상상력으로 되살아났다. 지금 겨울 승부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 특히 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새겨볼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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