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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 일이지만 급기야 성별논란의 포문이 터졌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한 여성계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가장 큰 변화와 쇄신"이라고 말한 것을 야당이 문제를 삼았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론'이 알려지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물론 민주통합당이다. 대변인이 나서 박 후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공격의 방향이 어째 좀 비뚤해 보인다. 정호성 대변인은 "박 후보에게 여성성은 없다. 남성성을 가진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쇄신과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당이 아닌 대선캠프 대변인은 한발 더 나갔다. 박광온 대변인은 "박 후보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사회정치적' 여성으로서 여권신장 등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찾을 수가 없다"고 발언 수위를 높였다.

 새누리당은 모처럼 반격에 신이 났다. 여성 CEO의 대표로 선대위원장 직을 맡은 김성주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국민이 여성 대통령을 기대하는 것은 박 후보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 리더십을 통해 정치가 변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맞받았다. 정몽준 공동선대위원장도 거들었다. "박 후보에 대해 야권이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이라고 말한 것은 인권 모독이자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정도 수준으로 정리된다면 그저 그런 여야의 공방전쯤으로 치부해도 될듯했다. 하지만 세치 혀로 먹고사는 정치평론가들이 이 같은 호재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연일 여성대통령 아이템으로 공중파와 케이블이 시끌하다. 야성이 강한 한 인사는 급기야 '생식기' 운운하는 발언까지 해가며 박근혜 후보의 여성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어쩌다 우리 정치가 성별논란에 빠져 버린 것인지 안타깝지만 대선캠프에 모인 자들이나 정치평론을 한다는 인사들의 수준이 그 정도다 보니 딱해도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여성대통령이나 공주, 여왕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여름 모 방송사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롤모델'을 물었을 때, 박근혜 후보가 '엘리자베스 1세'라고 답한 적이 있다. 가뜩이나 공주논란에 휩싸인 박 후보가 스스로의 입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나오자 틈만 보던 이해찬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새누리당이 박근혜를 거의 여왕으로 만드는 대선레이스에 들어간 것 같다"며 "우리나라가 봉건왕조시대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한다"고 비아냥댔다.

 박 후보가 롤모델로 삼은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영국 정치평론가들은 엘리자베스의 치세가 있었기에 대처라는 전무후무한 여성총리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의 영향은 컸다. 국제적으로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대영제국의 영광을 실현했고 국민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폈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왕이라는 찬사에 가려 한 여성으로서의 삶은 희생해야 했다. 공주시절에는 어머니 앤 불린이 간통과 반역죄로 처형돼 '공주' 칭호도 받지 못했고 배다른 언니 메리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왕위계승은 멀게만 보였던 그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좌는 그를 더욱 단단한 영국 위대한 영국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열정에 가려진 인간적 우울은 "남이 쓴 왕관은 즐거워 보이지만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는 그의 한마디로 잘 전해지는 대목이다.

 문제는 여성인 그녀를 영국은 굳이 여왕이라는 성별에 가두어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자이기에, 평생을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정작 여왕을 배출하고 여성정치지도자를 장기 집권하도록 한 영국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이 시점에, 우리 정치판은 여성성 운운하며 성별논란에 빠져들고 있다. 롤모델로 삼은 사람이 여왕이든 장군이든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후대의 존경을 받고 국가에 헌신한 지도자라면 롤모델이 아니라 벤치마킹이라도 하는 것이 옳다. 여성성이 없다는 이야기나 생물학적 운운하는 따위는 저급한 인신공격에도 못 들어가는 사정잡배 수준의 잡담에 불과하다. 그 잡담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여의도 회견장에 오르고 공중파와 케이블의 시사토론 아이템이 된다면 코미디다. 하긴 투표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투표를 독려하는 수준도 모자라 12시간의 투표시간도 늘려야한다, 안 된다로 샅바싸움을 하는 수준이니 뭐든 논쟁거리가 못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말이다. 제발 가만히 있는 국민을 수식어로 달고 '국민들이...' 원하는 듯 국민을 팔아먹진 말았으면 한다. 정말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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