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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애틋함이 있는 곳이에요"
 독도 탐방을 마친 후 예사롭지 않은 너울성 파도를 보면서 한국기자협회 독도탐방단을 안내한 문화해설사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남겼다. 그러나 그 미소의 의미를 확인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 뉴스의 일기예보는 동해중부 먼 바다의 파고가 5m가량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든 뱃길이 끊겼다는 통보가 왔다. 해설사는 수평선에서 뾰족하게 흔들리고 있는 너울을 가리키며 뱃길이 열리려면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2박 3일 일정의 독도 탐방 마지막 날에 갇혀버려 떠날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풀 죽은 일행에게 해설사는 울릉도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갈 수 있겠지'하며 꾸렸던 여장을 다시 풀고 반쯤 말린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을 때 해설사가 "울릉도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라며 위로했다.
 

 생각해보면 울릉도에서 둘러본 것은 탐방단이 도착한 첫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도동항과 독도박물관, 저녁에 술 한 잔 기울이기 위해 찾은 저동항 바닷가가 전부다. 육지에 나가 울릉도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기엔 쑥스러운 상황이다. "울릉도에 왔다가 예정대로 나가는 분들은 착하게 살지 않은 거래요. 착한 분들은 울릉도가 더 구경하고 가라고 붙잡는 답니다"는 해설사의 말이 밉지 않았다.  울릉도는 사흘만 머물면 사흘 정도의 볼거리를, 열흘이면 열흘간의 볼거리를 본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일행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어디를 가볼까?'하는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때 해설사는 '걷자'고 제안했다. 걸으면서 울릉도의 기운을 듬뿍 받아 가라고 했다. 콘크리트가 깔린 도로보다는 옛 울릉도 사람들이 걷던 길을 걸으면서 '진짜' 울릉도를 체험하자는데 모두들 쉽게 동의했다.
 

#내수전 석포마을 옛길
교통이 불편했던 울릉도는 유독 옛길이 많이 보존돼 있다. 최근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일주도로가 거의 마무리되면서 비록 옛길은 많이 소멸됐지만, 그래도 대표적인 옛길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수전 석포마을 옛길과 나리분지 신령수 원시림 숲속길, 황토구미~태하등대 옛길, 도동~행남 가는 길 등이 대표적이다.
 마음을 추스른 다음날, 일행은 내수전 석포마을 옛길을 걷기로 했다. 이 구간은 울릉도에서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해안선을 따라 길을 내는 공사를 하고 있다. 오는 2016년 공사가 마무리되면 4.4㎞ 옛길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봉래폭포로 가는 길에 만난 측백나무 숲.
 비를 뚫고 숲 속 길에 들어서자 울창한 숲과 깎아지른 해안 절벽이 어루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너도밤나무와 섬피나무, 섬잣나무 등의 울릉도 특산식물과 동백나무, 굴거리나무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북면에는 일색고사리, 고비 등 양치식물들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정매화곡 쉼터를 지나 천부에 이르는 길은 250만 년 전 섬이 태어난 때부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속살을 다 내어주기 싫은 듯 구름 안개가 짙어지고 빗줄기도 굵어진다. 바다를 끼고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다 보니 눈길이 자꾸 바다로 향한다. 하지만 눈앞에 있어야할 죽도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해설사는 "맑은 날이면 독도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옛 길에서 돌아오는 길 나리분지에 들러 늦은 점심을 했다. 해설사가 추천한 산채비빔밥이다. 도라지, 고비, 부지깽이 등 나물은 부드럽게 혀를 놀리고, 곁들여 먹는 명이김치도 그야말로 일품이다. 주인장이 추천한 삼나물 무침은 새콤달콤 혀를 자극하고, 뼈를 붙이는 데 효능이 있는 마가목주 한 잔 곁들이니 여기가 천국이다.
 

 울릉도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한 나리는 성인봉과 주변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움푹 주저앉은 분지에 자리해 있다.
 울릉도에는 우산국 시절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오랫동안 빈 섬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개척민이 들어와 살았다. 나리는 바로 그 개척민 1세대가 자리를 잡고 살던 마을이다.
 때문에 나리에서는 아직도 개척시대 삶의 흔적인 투막집(본체는 귀틀로 되어 있고, 지붕은 억새를 올렸으며, 본체 주위에 억새나 옥수숫대를 엮어 만든 '우데기'를 둘러친 집)과 너와집이 남아 있다.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로 이어진 아늑한 숲길 또한 길의 탄력과 질감이 살아 있는 비밀 코스로 통한다.
 

#황토구미~태하등대 옛길
해설사가 추천한 또 다른 울릉 옛길은 서북쪽 태하등대로 이르는 길이다. 비가 그친 울릉도는 어느새 바람과 파도의 천지다. 태하에는 원래 관광용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지만 거센 강풍 탓에 운행을 멈추었다. 일행은 해안에서부터 옛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오래된 동백나무가 압권이었다.
 30분 가량 오르니 전망대가 잘 꾸며진 태하등대가 보인다. 태하등대 전망대의 조망을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일명 '대풍감 해안절벽'이라 불리는 이곳의 풍경은 울릉도에서 단연 최고이며, 사진가들도 입을 모아 국내 최고의 비경 중 하나로 꼽는 곳(한국 10대 비경)이다.
 이곳에서 북면 쪽을 내려다보면 현포항과 추산 일대의 절경이 펼쳐지고, 대풍령 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한 '대풍감 향나무 자생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울릉도 바다의 물빛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한데, 옥빛과 쪽빛과 남청색이 기묘하게 어울린 빛깔이다.

   
한국의 10대 비경 중의 하나인 태하등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풍감 해안절벽 전경.

 

 태하리에서 구불구불 현포령을 넘어가면 드넓게 시야가 트이면서 현포항과 북면 일대의 해안 절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북면 해안은 비경의 연속이다. 우산국 시절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현포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신기하게 생긴 공암(일명 코끼리 바위)이 조금씩 코끼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천부에서 섬목으로 이어지는 해안에는 딴방우(딴바위), 삼선암, 관음도(깍새섬)가 차례로 절경을 드러낸다. 울릉도 3대 비경 중 제1경으로도 꼽히는 삼선암은 멀리서 보면 2개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3개로 되어 있다.
 여기서 관음도는 지척이다. 깍새(슴새)가 많아서 깍새섬이라고도 불리는 관음도는 죽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옛날 해적들의 소굴이었다는 관음쌍굴이 자리해 있다. 최근에 이곳에는 섬목과 관음도를 연결하는 현수교가 생겨 관광객들이 쉽게 오를 수 있다.
 

#도동~행남 가는 길

울릉도의 관문격인 도동항은 늘 번잡하다. 길은 육지 쪽으로 가파르고, 도시면적이 좁지만 있을 만한 것을 모두 갖춘 도시의 풍광을 지녔다. 이곳에는 울릉군청을 비롯한 관공서와 독도박물관이 있고, 망향대와 연결된 케이블카 승강장도 있다. 도동 관광은 주로 이 케이블카를 타고 망향대에 올라가 도동 해안 경관을 보거나, 도동에서 행남을 거쳐 저동으로 이어진 해안산책로를 걷는 것이다.
 해안산책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풍경을 자랑하며 도동항에서 저동 촛대바위까지 이어진 해안 절경을 100% 즐길 수 있는 멋진 산책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해안산책로는 높은 너울성 파도로 인해 며칠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일행은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울릉군청 뒤쪽의 옛길을 올라 행남등대와 저동쪽으로 이어진 옛길을 걷기로 했다. 해안선이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바닷가 옛길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만만치 않다. 
 

   
해질녘에 찾은 저동에서 행남등대와 도동항으로 이어지는 해안산책로. 이 해안산책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풍경을 자랑하며 도동항에서 저동 촛대바위까지 이어진 해안 절경을 100% 즐길 수 있는 멋진 산책로로 유명하다.

 가파른 옛길의 초입에서부터 헉헉거리는 일행에게 해설사는 "집 나간 염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네발 달린 산 짐승이 살지 않는다'는 울릉도에서는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실제 힘든 산행길 곳곳에서 목격되는 검은 염소들이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도동에서 막 벗어날 즈음 언덕배기에 이르자 초로의 어르신이 말을 건넸다. 어르신은 "사람이 기럽다 아인교?"하며 더덕이 '목욕만 했다'는 술을 건넨다. 더덕의 알싸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울컥' 마음이 아린다. '애틋함'이란 사람을 그리는 마음인 것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 시인의 '그리움'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행남등대로 이르는 길은 대나무 숲과 해송 숲이 일품이다. 특히 해송숲 길가에 노랗게 핀 털머위꽃이 눈에 어린다. 행남등대 뒷편에 세워진 전망대에 서면 해안산책로의 절경과 함께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높은 파도 때문에 내해에 정박한 배들이 저무는 햇살에 더욱 또렷하다. 누군가 '한국의 나폴리'라고 했다. 나폴리를 가보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을 했다.
 울릉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뭍으로 나가 조소를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캐나다 등 외국에서 생활하다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해설사는 "외국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울릉도만한 곳이 없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엿새 동안 예기치 않게 갇혀 호사(?)를 누리고서야  울릉도를 '애틋함을 간직한 섬'이라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글·사진=강정원기자 m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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