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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 사라진 단일화가 마지막 고개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대통령 선거는 상영 날짜는 잡혔지만 여전히 주연배우가 없다. 예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열고 자신의 지지자가 주연으로 나서 흥행의 돌풍을 일으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줄을 선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실상 사람이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지 싶다. 그 기대를 충족할 배우가 두 명으로 정리됐고 마지막 한 명의 선택을 위해 두 사람이 벼랑 끝에 섰다. 진보의 이름으로 조금 더 왼쪽인 문재인과 조금 덜 왼쪽인 안철수가 루비콘 강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이번 대선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가 연일 언론에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인 보수우파의 후보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대선 때처럼 보수쪽 후보가 절대 우위에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양자 대결에서도 밀리는 상황이지만 마치 절대 우위에 있는 듯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여당의 사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닌듯하다. 레임덕에 뒤뚱거리는 이명박 정부와 차별성을 보여야하고 진보의 물결에 밀려 가능한 왼쪽으로 몇 발은 더 나아가야 하는 보수진영의 사정은 진퇴양난이다. 게다가 내부 결속이 시급하지만 툭하면 집안에서 불협화음이 몹쓸 소리를 낸다.

 딱하지만 보수의 사정이 그렇다. 문제는 우리의 보수가 정말 보수의 이름에 걸맞은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미안하지만 없어 보인다. 보수의 옷은 입었지만 옷감은 붉게 물들었고 간간히 절대 버릴 수 없는 하얀 과거는 문신처럼 남긴 모양새다. 흔히 보수를 두고 도덕성과 준법성, 안정성을 기둥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보수는 세 가지 기둥을 잃어버렸다. 그 원죄는 이명박 정부다. '강부자 내각'부터 '고소영 정권'까지 도덕성보다 능력이 우선되는 가치로 보수를 인테리어 했다. 법치는 실종됐고 연평도 포격에 안정이 날아갔다. 경제를 외치고 안보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서민들의 주머니는 곡소리를 냈고 29살 애송이가 전면에 등장한 북한은 더 큰소리만 치고 있다. 보수 정체성의 결핍, 보수 가치에 대한 진정성 부족이 결국은 이 땅의 보수들을 안방으로 내몰았다. 가능한 따듯한 아랫목을 비집고 이불 덮어쓰고 찬바람을 피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말이다. 보수의 가치는 수구가 아니다. 아랫목을 파고들면 우선은 냉기를 피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불을 떼 주는 일꾼이 필요하다. 스스로 불을 떼고 아랫목을 데우는 보수는 건강하지만 고개 처박고 이리오너라를 외치는 보수는 불 떼는 이가 떠나면 냉방에서 얼어 죽기 마련이다.

 적어도 지금, 대선을 목전에 둔 우리 사회에서 보수는 실종됐다. 수구골통으로 몰리고 시대흐름을 읽지 못하는 '뒷방 늙은이'로 치부될까 싶은 보수는 아랫목만 파고들고 있다. 보수가 이 모양이니 목소리 큰 쪽이 대세처럼 보인다. 그래서 일부 보수논객들은 "진정한 보수는 아랫목에 있지만 때가되면 이불 박차고 대문 밖으로 나올 것"이란다. 천만의 말씀이다. 진보의 목소리가 커지고 거리에 촛불이 환하면 대문 안쪽은 불을 끈다. 이 따위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보수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지켜가면서 개혁을 하려는 세력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움켜쥐고 안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골통이다. 세상과 마주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다. 가치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신념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고 그 힘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동성에 있다.

 미친 소에 분개하고 독재와 유신에 살기를 느끼는 진보는 능동적이다. 하지만 그 진보의 능동성은 모순이 있다. 인권과 반독재,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야기 하는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은 휴전선 넘어 북한의 인권과 그들의 독재, 그들의 반민주성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문다. 지구상 최악의 독재상태이고 인권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데 그렇게 인권을 주장하고 독재를 혐오하는 자들이 이상하게 북한에 대해서는 눈만 끔벅거릴 뿐이다. 그런 모순을 지적하고 그런 위선을 책망해야 할 보수는 사라졌다. 500명이 넘는 좌파교수들이 권력에 줄을 선채 궤변과 세치 혀로 이 땅의 보수를 몰아붙이지만 보수교수나 우파교수는 무엇이 두려운지 분필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이 땅의 보수는 사라졌다. 그래도 당신은 보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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