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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구태가 이번에도 역시나 되풀이 되고 있다. 이번엔 구태가 오히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있는 선거전은 아예 '노무현'대 '박정희'의 한판 싸움으로 판을 짜고 있다. 애초에 이런 구도는 아니었다. 박근혜 캠프는 '미래'를 이야기 했고 문재인 캠프도 '새 시대'를 모토로 선거운동을 기획했다. 과거에 갇히면 미래가 없다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논리에 근거한 두 캠프의 미래지향적 선거운동은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로 문인 김지하 시인이 노구를 이끌고 강연을 했다. 과거를 허물고 미래로 가자는 이야기다. 그는 한 강연에서 "우리나라 4,500만 인구 중 1,000만명이 일하는 여자들인데 이제 여자에게 현실적인 일을 맡기는 때가 되었다"면서 "박근혜 후보가 이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엇이 이상하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박정희 시대에서 7년간 감옥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모두를 잊었다. 이제는 새 공부를 하는 뜻으로 여자세상을 그려보자"고 말했다.

 김지하 시인은 '독재자 박정희'에 맞섰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그는 1970년 장준하 선생이 펴낸 사상계에 '오적'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저항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유신을 온몸으로 거부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당연히 탄압이었고 유신정권의 지하실에 숨어 청춘을 보냈다. 그런 그가 돌연 박근혜 띄우기에 앞장 선 것은 누가 봐도 반전이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답했다. 누구보다 탄압을 받았지만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잊었단다. 아버지 시대의 아픔을 딸에게 전가해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세간의 반응은 완전히 갈렸다.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했다는 이야기부터 저항시인의 내공이 낳은 곧은 소리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누구보다 유신에 분노해야 할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 것은 변절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한 사람은 바로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않는 안도현 시인이다. 어느 날 정치판에 들어간 안도현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측 공동선대위원장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있다. 그는 김지하 시인이 박 후보를 공개지지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누구를 지지하든 문제는 안 된다"면서도 "박정희 군부독재 유신에 항거한 대표시인이었던 김 시인이 그 딸에 지지를 표한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타는 목마름으로'는 못 부를 것 같다"며 김 시인에 대해 "90년대 이후에 문학적으로 긴장을 많이 잃어버린 분"이라고 평가절하하기까지 했다.

 한 세대 가까운 연령 차이를 둔 두 시인의 선명한 입장은 지금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안도현이 지향하는 세계는 과거를 심판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돌직구 세상이다. 하지만 김지하 시인의 세상은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지향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자는 변화구다. 돌직구는 승부가 빠르다. 좌우나 상하는 있지만 방향과 속도는 일정하기에 관전자 입장에서는 결과가 빨라서 좋다. 안도현의 이야기는 결국 김지하 당신도 한 때는 돌직구였는데 왜 지금은 변화구를 들고 그 자리에 섰느냐는 비난이다. 하긴 시인 안도현의 세계에서 변화구는 왜곡이자 변절일 수 있다.

 백석 시인의 환생으로 불릴 만큼 서정성이 짙은 안도현은 발표한 시마다 세상과 마주하는 바탕색을 깔고 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너에게 묻는다' 등 안도현의 작품은 작품 자체가 세상을 향한 시인의 외침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문득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이렇게 밝혔다. "서민들의 골목상권을 무너뜨리고, 민간인 사찰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4대강 삽질로 산하를 무너뜨리고, 용산참사로 세입자들의 둥지를 무너뜨리고…울화가 치밀었다. 문학은 세상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연애편지보다 정권교체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지난날이었다" 그의 일성은 앙가주망을 외친 사르트르나 일제강점기 시절, 카프문학에 열렬했던 젊은 문인들의 외침을 닮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상대 후보인 박근혜를 공주라 칭하며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는 일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하다"고 비아냥댔다. 특히 그는 흉탄에 부모를 잃은 과거를 광고 콘셉트로 잡은 박 후보를 두고 " 박 후보의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나를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뱉었다.

 노회한 시인의 박근혜 지지 발언이 의외였다면, 만지작거리는 어휘마다 눈물 한 방울 머금게 하던 안도현의 이 발언은 경악할 일이다. 그래서 안도현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자. 너는 우리에게 여러 번 뜨거운 사람이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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