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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의 애잔한 가락이 흘러나오는 노래비.
최근 밀양시가 조성을 마무리한 '밀양 아리랑길'은 도심과 근교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산책로다.
1 코스는 6.5㎞로 밀양 관아를 시작으로 영남루까지, 2 코스는 2.5㎞로 향교에서 박물관까지, 3 코스는 6㎞로 산림욕장에서 삼문동 송림까지다.
이 중 영남루와 아랑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사, 밀양읍성, 밀양관아 등을 둘러보는 1코스는 밀양 아리랑길의 백미다.


#밀양관아

밀양아리랑길 1코스의 시작은 지난 2010년 밀양시가 복원한 '관아'다. 밀양 관아는 선조25년(1592년) 4월 왜란의 전화를 비켜가지 못하고 전부 불탔다. 1612년에 원유남 부사가 부임해 원래 자리에 관아를 재건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7년도에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이 신축 이전하면서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무소의 청사로 이용됐다.
 

 도심의 관아를 들어서기전 도로변에 19개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부사와 밀양을 관할하던 관찰사 등이 재임기간 동안에 베푼 선정과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들이다. 두명의 포졸이 서 있는 대문을 지나면 현감 등이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던 동헌 정청이다. '근민헌(近民軒)'이라는 현판과 그 아래 대청에 앉은 목민관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근민헌은 민가근불가하(民可近不可下) "백성을 친근히 하되 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당에는 300년가량 되었다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관아의 부침을 웅변이라도 하듯 차가운 겨울을 나고 있다. 동헌 정청 주위로 매죽당(梅竹當)(부사의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처하던 건물), 북별실(北別室)(부사가 외부인을 만나거나 책을 읽던 주택의 별당 기능에 해당하는 건물)등이 복원되어 있다.
 

   
'밀양아리랑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영남루 누각에서 바라본 밀양천과 시가지 일대의 모습. 영남루는 울산의 태화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의 3루라 불린 우리나라 대표적 누각이다.

#영남루
관아를 지나 밀양강 쪽으로 5분여를 걸어가면 '영남루'다. 울산의 태화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루라 불리었던 누각이다. 밀양 영남루는 신라경덕왕(742~765년) 때 신라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되었다. 현재의 누각은 이인재 부사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다.
 영남루를 오르는 계단은 특이하다. 각진 계단을 지그재그로 깎아 길을 내어 노약자와 장애인들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가 느껴지고 창의성이 돋보인다. 지그재그 길을 오르며 잠시 세상을 둘러본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시설들이 얼마나 많은가. 발상의 전환에 박수를 보낸다.
 

 입구의 안내판에 의하면 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 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영남루가 이처럼 화려한 것은 국가의 행사를 많이 치른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양에서 영남대로를 지나 부산의 다대포로 가는 조선통신사도 이곳에서 보름씩 머무르며 피로를 풀었다. 당시에는 당상관이 아니면 누각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영남루는 평소에도 관람객들이 누각에 오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누각은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조각이 한데 어우러져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특히 누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선생 등 당대의 명필가들의 시문 현판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 부사의 아들 이증석(11세)과 이현석(7세) 형제가 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판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다. 눈앞 응천강 주위로 고층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일부 둔치도 일자형의 정비해 옛 멋을 많이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옛 선현들이 느꼈을 '광활한 아름다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랑낭자'의 정절과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아랑사.

#아랑사

영남루의 후문으로 나오면 <낭랑 십팔세>,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의 이 지역 출신 작곡가 박시춘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박시춘 생가를 내려오면  밀양읍성과 무봉사, 아랑사로 가는 갈래길이다. 이정표 곁에는 '밀양아리랑'노래비가 있고, 그 속에서는 귀에 익은 민요가 귀를 즐겁게 한다.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 날 좀 보소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 정든 님이 / 오시는데 / 인사를 못 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 입만 방긋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밀양아리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요이다. 밀양 사람들이 정절을 지키려다 죽음을 당한 '아랑 낭자'를 기리며 부르던 노래가 밀양아리랑이라 한다. 아랑 낭자를 기리는 아랑사가 영남루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신라의 달밤> 등을 만든 이 지역 출신 작곡가 박시춘의 노래비.

 아랑의 전설은 애잔하다. 옛날 밀양부사 이모(李某)에게 아랑(阿娘)이라는 딸이 있었다. 자태가 곱고 인덕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사모했다. 그때 관아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아랑을 본 뒤 사모함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랑을 유인해 욕심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사내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당황한 사내는 아랑을 살해하고 숲 속에 묻어버렸다(혹은 아랑이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부사가 용의자들을 불러 심문했지만  진범을 밝히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나비 한 마리가 아랑을 사모하던 젊은이의 어깨에 앉았다. 몸바꿈한 아랑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아랑사의 입구는 아랑낭자의 이름을 딴 정순문(貞純門)이다. 이 곳 사람들은 이 정순문을 통해 아랑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현지인인지, 외지인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사랑을 이루게 해 달라며 나란히 들어서는 반면, 밀양 사람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아랑 낭자의 마음을 배려해 남녀가 떨어져 들어온다고 한다. 아랑사 정면의 아랑 초상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어머니인 고 육영수여사의 부탁을 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목구비와 얼굴선을 통해 아랑의 고결하면서도 야무진 성격, 단호한 의지가 느껴진다.
 아랑사를 나와 다시 오르면 영남루처럼 밀양강을 굽어보는 곳에 작은 사찰이 있다. 옛 영남사의 암자였던 무봉사다. 그곳에 통일신라의 석조여래좌상(보물 493호)이 있다.
 

   
최근 복원된 밀양읍성의 망루인 무봉대 모습.

#밀양읍성

무봉사를 들러본 후 또다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밀양읍성 복원지다.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에(1497년) 만든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는 우물이 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이 1902년 경부선 철도공사 때 성벽과 성문을 모두 헐어 철도 부설공사에 쓰고, 그나마 남아있던 석재들도 6·25전쟁 당시 방호용으로 써버려 거의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읍성에는 사명대사의 동상이 있으며 성곽주변의 송림이 옛 멋을 더하고 있다.
 겨울에 찾은 읍성에는 잔설들이 가득했다. 밀양읍성의 망루였던 무봉대에 오르는 성곽길에는 수 많은 깃발이 찬 겨울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무봉대에 올라 사위를 바라보니 밀양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선 '햇빛이 빽빽히 비추는곳' 밀양보다는 '용의 벌판'과 어울렸다. 이 곳 사람들은 용을 뜻하는 옛말인 '미르'란 우리 말의 발음을 한자로 쓰면서 '밀(密)'자를 따왔고, 벌판을 뜻하는 벌이 '볕(陽)'으로 쓰이면서 만들어진 이름이 '밀양', 곧 '용의 벌판'이란다.
 이밖에 1코스에는 삼문동 송림이 볼거리다. 삼문동 송림은 이조말엽 고종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방수림으로 6,000여평에 100여년생 곰솔이 빽빽하게 심어져 밀양문화제 등 각종행사와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글·사진=강정원기자 m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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