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언양 새마을떡방앗간에서 주인장이 갓 뽑은 뽀얀 떡가래를 늘어놓고 있다. 유은경기자 usyek@

"내
가 5남매를 시집장가 다 보냈는데 명절이면 전국서 다 모여. 손주에 조카들까지 오면 스무 명이 넘지. 직접 농사지은 '냉천쌀'로 골미를 빼 떡국 끓이면 걔들이 그렇게 좋아해. 우리 며느리 말로는 손자, 손녀들도 그 쌀이 맛있어서 다른데 가서는 밥이 맛없다고 할 정도야."
 5일 찾은 언양시장 내 부산 떡 방앗간. 설날에 먹을 가래떡을 하러 온 변선자 할머니(65·언양 냉수정 마을)는 다가 올 설날 시골집이 자식·손주들로 북적거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뜬다.
 방앗간엔 밤새 불린 멥쌀이 담긴 고무 대야부터 쌀이 담긴 보자기, 손수레 등이 입구계단까지 내려와 있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케 했다. 
 
   
떡방앗간 한 켠에 마련된 화롯가에선 할머니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유은경기자 usyek@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한 할머니가 본의 아닌 새치기를 하자, "줄 똑바로 서소. 뒷사람들도 다 기다리는 중 아인교" "꼬리가 어딘교?" "일로 오이소" 하며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고 지고 온 쌀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주인이 "우예 해갈낀데요?"라고 묻고, 곧이어 "골미로 빼주소"란 답이 돌아온다.
 울산 지역 어르신들에게 가래떡이란 말보다 골미가 더 익숙하다. 이 날 이곳을 찾은 대부분의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골미를 빼가는 모습이었다.
 

 좀 더 구석으로 들어가 보니 방앗간 한켠에 마련된 난롯가에 옹기종기 할머니들이 모여 "아지매, 언제왔노?" "내사 아까왔지"하며 서로 반갑게 안부를 묻거나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다.
 '옛날 설 모습도 지금과 비슷하지요?'라고 운을 떼자 줄을 섰던 할머니들이 일제히 '아이다'하며 손사래를 친다.
 "이런 방앗간이 어딨었노. 찹쌀을 찌고 떡메로 직접 쳐서 떡을 만들었제. 시루떡도 절구에 쌀을 찧고 체에 쳐서 가루를 내고, 거기다 검정깨 팥고물을 넣어 쪘어. 여러 사람 나눠 먹을라면 그 양도 얼마나 많았노, 그걸 다 맨손으로 한기라"
 

   
방앗간 아주머니들이 불린 멥쌀을 기계에 넣어 하얀 쌀가루를 만들고 있다. 유은경기자 usyek@

 방앗간은 일상의 풍요로움이 묻어나는 곳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온갖 것들이 다 들어온다. 한톨 한톨 날아갈 새라 정성껏 털고 말린 깨를 가져와 기름을 짜고, 김장하고 1년 내내 양념해 먹을 고추를 빻아 낸다. 또 집안 잔치며 명절이 되면 온갖 떡을 하러 오고,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추석, 설 명절에는 사람이 몰려 한나절 시간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지만 넘쳐나는 인심 때문에 지겹지 않은 곳이다.
 

 사람들이 밤새 불린 멥쌀을 혹은 쌀 그대로 가져오면 주인장은 소금과 함께 기계에 넣고 곱게 빻는다. 거기에 적당히 물을 부어 반죽을 하고는 다시 한 번 기계에 넣어 돌린다. 그리고는 찜기에 넣어 스팀으로 찌는데, 대목이라 양이 많아 35개에 달하는 나무틀이 쌓여있었다. 그렇게 잘 익은 떡을 기계에 넣고는 길게 뽑는다. 굵기도 가늘게 할 뿐 아니라 찰지고 쫀득하라고 한번 더 넣어 뽑아내면 길고 매끈한 '골미' 즉 가래떡이 완성된다.
 

 이곳에서 20여년 '부산 떡방앗간'을 운영해 온 김태호씨(59)의 손놀림이 분주하면서도 정확하다. 모락모락 김을 내며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을 눈대중으로 성큼성큼 잘라 물속으로 집어넣는데도 길이가 일정하다.
 "예전에 울산에 떡집이 몇 곳 없을 때만 해도 참 재미를 봤는데, 요새는 이런 대목에나 손님이 많아. 이런 날 떡방앗간 일은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데 노가다 일보다 더 힘들어. 그래도 장사가 잘 되는 게 낫지"하고 김 씨는 예전을 회상했다.
 

 언양 지역의 떡 방앗간들은 도심보다 인심이 후하다. 최근 대부분의 떡집들이 1.6kg을 한 대로 치지만 이 지역은 2kg를 한 대로 친다. 게다가 직접 갖고 온 쌀로도 떡을 뽑아주고, 그간 쌓인 연륜에 소금간과 뜸까지 잘 맞아 그 맛이 일품이다 보니 시내에서도 왕왕 이곳을 찾는다.
 이 날 찾은 언양 새마을 떡방앗간, 시장 떡방앗간 등 다른 곳들도 모두 북적이는 발길에 모락모락한 김을 피워 올리는 등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면 한과도 빼놓을 수 없다. 언양파출소를 지나 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강정거리라 불러도 좋을만한 오랜 강정집 몇 곳이 줄지어 있다. 뻥튀기 장수가 뻥~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피우는 풍경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눈요기를 하며 몇 집을 지나면 50년간 강정을 만들어왔다는 '언양 강정'이란 간판을 단 가게가 나온다. 1대 주인이었던 시어머니 대신 아들, 며느리들이 짬짬이 틈을 내 그 맛을 지켜오고 있는 이곳은 다른 곳보단 가격이 조금 센 편이지만 그만큼 사용하는 곡식이 좋다.
 

   
맛난 유과를 만들기 위해 튀긴 쌀, 참깨, 땅콩 등을 비율에 맞게 섞고 있는 아주머니. 유은경기자 usyek@

 가게 안에 들어서니 이곳에서도 직접 농사지은 찹쌀이며 보리를 들고 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다.
 "기자양반도 여기 앉아 이거 한번 먹어보라"고 건네는 따뜻한 말들이 비록 짧은 거리지만 시골인심을 느끼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마솥에 물엿, 기름 등을 두르고 튀겨진 쌀이며 땅콩, 깨 등을 함께 볶아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특히 전통 가마솥은 튀김기보다 열전도율이 높아 기름이 쉬 식지 않아 강정이 더 바삭하게 튀겨진다고. 그렇게 볶여진 것들을 강정 판에 쭉 들이부어 모양을 만든 후 기계의 힘을 빌려 같은 크기로 자르기만 하면 강정이 완성된다.
 특히 똑 부러진 말씨와 상냥한 웃음으로 절대 안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막내 며느리 안정진(40)씨는 "질 좋은 쌀과 보리, 참깨, 옥수수 등의 곡식을 직접 뻥튀기로 튀긴 후, 오랜 비법대로 박상을 만들다보니 다른 곳보다 바삭바삭하고 물리지 않는 게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모양을 찍어내는 방식은 기계식으로 바뀌었지만 그 외에 과정은 거의 전통식으로 하다 보니 옛 맛 그대로다.
 

   
더 맛있는 유과를 만들기 위해 꼭 뻥튀기로 튀겨낸 쌀을 고집하는 언양강정집. 유은경기자 usyek@

 순서를 기다리는 한 할머니가 옛날 유과를 만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유과를 만들려면 한 달 전쯤부터 찹쌀가루를 과자처럼 만들어 아랫목에서 말려야 해. 설이 다 되면 그것을 들기름이나 콩기름에 튀기면 유과가 만들어지지. 여기에다 벼를 가마솥에 볶으면 하얀 박상(튀밥)이 되는데, 그것을 엿물에 적신 유과에 바르면 하얀 꽃이 안 피나. 지금 여서 만든 과자하고는 맛이 비교가 안돼"
 

 시장 한 켠 제수음식을 아예 만들어 파는 가게도 눈에 들어온다. 몇몇 젊은 아낙들이 이것저것을 살피고 있다. 핵가족이 되고, 주부들이 직장에 다닐 경우 어쩔 수 없이 제수음식 전문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국적 없는 퓨전 음식들이 제사상이 올라가는 세태가 안타까운 것은 전통시장을 고집하는 시골 어르신들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글=김주영기자 uskjy@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