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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해 전 5월 이었던가? 울산 남구에 자리한 문화예술회관 대전시실에서 '백두산 사진전' 이 있다고 신문에 소개되었다. 사진작가가 누군가 하여 기사를 읽어보니 방어진 출신의 홍종화(洪鍾華)였다. 홍작가의 바로 위 누님과는 중학 동기여서 한달에 한번 씩 만나는 '대왕암회' 란 모임이 있고, 작가는 방어진 중학교의 후배이기도 하다. 며칠 뒤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예회관 전시실을 들어서니 첫눈에 입이 딱 벌어졌다. 나는 이 전시실에서 세 번 놀랐다. 벽면 전체를 눈덮힌 백두산의 모습과 천지의 겨울 풍경에 놀랐고, 두 번째 놀란 것은 여태 사진전을 보았지만 한 사물(피사체)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앵글을 잡은데 놀랐다. 세 번째는 이 백두산의 겨울사진을 찍으려고 공중 촬영을 한 것과 이 촬영에 필요한 수억의 경비를 겁내지 않고 지불한 그의 배포에 놀랐다.또 놀란 것은 그 뿐이 아니다.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는 백두산과 천지의 헬리콥터 촬영은 생사를 초월한 대모험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몸을 밧줄로 묶어 상반신을 기창 밖으로 반쯤 내밀어 촬영했다는 것과, 촬영중 돌개바람에 하마터면 천지의 깊은물에 곤두박질 칠뻔 한 곡예비행의 순간을 듣고 더욱 놀랐다. 그렇다.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려면 생명을 초월한 모험과 뼈를 깎는 아픔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절감했다. 그 때 이 전시회의 출품된 작품의 이름이 '相生' 이었다. 나는 생소한 이름에 상생, 상생하면서 몇 번을 되뇌이며 감동적인 전시장을 떠났다.


 그 후 내게서 상생이란 다소 생소한 단어가 잊혀져 갈 무렵 느닷없이 지난해부터 정가에서 이 상생이란 말이 부각되었다. 노대통령과 각당 대표들이 상생이란 말을 썼고, 이에 질세라 언론에서까지 상생이란 말을 거침없이 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상생' 이란 말을 함부로 쓸까 하고 의아심을 가지면서 국어사전을 뒤적거려보니 명쾌하게 뜻이 적혀 있었다.
 <민속> 오행설에 있어서, 나무에서 불, 불에서 흙, 흙에서 쇠, 쇠에서 물, 물에서 나무가 남을 이름. '(대) 상극' 이라고 되어있다. 이 말은 민속상의 용어이지 결코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는 뜻이 아닌 것 같다. 이 상생이란 말을 가장 명확하게 지적해 주는 글이 한국국어교육학회 진태하(陳泰夏) 회장이 어느 잡지에서 시원하게 밝혀주었다. 앞서 말한 국어사전에서의 의미도 적고 있으나 같은 한자문화 권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상생이란 말의 풀이를 동일하게 하고 있다고 '예문' 까지 들고 있다. ''상생'은 본 뜻 어휘개념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아마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어원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생(生)'이 '낳다'의 뜻으로 쓰이는지도 모르고, '살다'의 뜻으로 추측하고 '상생(相生)'을 어렴풋이 '서로 살다'의 뜻으로 잘못 풀이해 쓴 것 같다'고 명쾌하게 지적했다.


 홍작가에게 대형작품의 백두산 사진의 상생이란 제목을 붙이게 된 이유를 물었다. 백두산 촬영 당시 16봉 중 9봉은 북한쪽에 있고 7봉은 중국쪽에 있어 사진을 촬영하려면 아무래도 한중 경계를 오가야 함으로 자연 북한 초병들과 만나게 되었고, 같은 동족이니 여러 가지 환경적 변화도 묻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마음이 열리고 정이 통해 가져간 먹거리, 담배, 필름 등 선물도 주며 동족의 온정을 나눴다. 그래서 남북이 이 한점 사진을 통해 함께 살자는 뜻으로 '상생' 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처음엔 불교적인 '화엄백두산' 이란 이름을 붙이려다 끈끈한 동족애에 이끌려 바뀐것이라고 했다. 해서 홍작가의 말을 따라 상생이란 뜻이 합당한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나 어쨋든 상생의 본뜻은 '서로 살자' '서로 산다' 는 뜻은 아닐성 싶다. 과거에는 전혀 쓰지 않던 말이 근래에 와서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예술계에서까지 철없는 학생들이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함부로 쓰고 있으니 우선 나부터 다시한번 '상생의 참뜻'을 숙고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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