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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외청 수장들의 인사가 끝난 지난 주말, 비보가 날아들었다. 반구대암각화 보존문제에 원형보존을 굽히지 않는 고미술전문가가 문화재청장에 임명됐다. 언론에서는 신임 변영섭 문화재청장의 임명으로 울산시의 물길 변경안은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아마도 신임 문화재청장이 그간 걸어온 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변영섭이 누군가. 그는 반구대암각화 보존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는 등 이미 10년 넘게 반구대 암각화의 원형 보존을 위해 앞장서 온 인물이다. 변 신임 청장은 고려대 교수 시절 문화재는 본래의 상태와 만들어질 당시의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최초의 여성 문화재청장인 그가 반구대암각화 보존문재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의 원형보존은 변 청장만이 아니라 울산시민, 나아가 반구대암각화의 문화사적 가치를 알고 있는 전 세계인이 원하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 고고학적으로나 미술사적, 인류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은 셀 수없이 많다. 마야와 잉카의 흔적 등의 유적과 유물들은 살아 있는 인류사 박물관이자 대대손손 보존해야할 자산이다. 또 우랄 알타이 자락에 널려 있는 인류문화 1번지의 기록들과 알타미르와 라스코, 퐁드곰의 동굴벽화는 수천 년의 세월에도 여전히 인류문화의 유전인자가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생명력을 가진 문화적 혈맥이다. 그 인류사의 흔적 가운데 반구대암각화가 있다. 산업화의 현실적 당위성 때문에 물속에 잠겨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은 반구대암각화의 바위그림에서 인류사의 변화과정을 발견했다. 그 발견은 그대로 세상에 알려져 이제 반구대암각화는 이 땅의 문화유산 이상의 가치로 세계 인류문화사에 기록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세계의 모든 고대문명의 흔적들이 어떤 식으로 보존되고 있는가에 있다. 짧게는 1,000년, 길게는 수만 년 전의 흔적은 시간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변모의 과정을 거쳤다. 자연재해부터 인류가 자행한 전쟁과 약탈, 개발의 상처들이 이들 문화유산에 그대로 전이됐다. 나일 강변에 위치한 아부심벨 신전의 경우 아스완댐 건설에 따라 수몰의 운명에 놓이게 되자 유네스코가 나서 이 신전을 원형대로 70m를 끌어올려 보존하고 있다. 스페인의 포즈코아 역시 수몰 위기의 벽화를 살려낸 지역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의 인류가 과거의 인류문화 자산을 부정하는 행위는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하는 아프리카 말리의 고대도시 팀북투는 이슬람 반군 안사르딘에 의해 자행된 문화유산 훼손 행위로 세계문화유산의 위험유산목록에 올라 있다.

 과거의 유물·유적이 의미 있는 것은 역시 현재성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문화유산이 혈맥을 움직이는 의미로 다가올 때 보존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독일과 프랑스 인들은 그들과 호흡을 같이한 고대 미술품이나 문화유산을 목숨처럼 지켰고, 그 결과 오늘의 사람들이 조상들이 남긴 인문학적 유전인자를 선과 점, 색과 빛으로 호흡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 역시 그렇다. 반구대암각화는 죽은 과거의 바위그림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울산사람들은 반구대암각화의 바위그림에 상징처럼 새겨진 고래와 배, 사냥의 흔적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천 년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위태한 가죽배는 세계 제일의 조선소로 변모했고 작살을 꽂는 원시인은 출항을 금지당한 포경선 선장의 애환에 녹아 있다. 무엇보다 고래는 여전히 울산의 곳곳에서 귀신고래, 범고래, 향유고래로 되살아나 고래축제와 고래이야기로 밤을 밝히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의 간극 속에 반구대암각화가 자리하고 있기에 원형 보존을 고집하는 변영섭 문화재청장의 학자적 소신은 가치가 있다. 원형보존이라는 물러설 수없는 소신이 인류사의 궤적을 온전히 지켜내고 후세에 그 가치를 물려줘야 한다는 신념이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변용의 과정이다. 오래고 깊은 시간의 간극은 울산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그 요구가 만든 것이 사연댐이고 그로인해 조국근대화라는 현실적 가치를 성취했다.

 이미 원형이 변한 반구대암각화를 두고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존은 망상이다. 어쩌면 원형보존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무기로 현재성을 이야기하는 오늘의 울산시민들을 천대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묻는다. 변영섭 신임 청장은 여전히 책 속의 남은 원형 보존에 목숨을 걸 것인지, 아니면 오늘의 현재성을 제대로 살펴 최선의 보존책을 이끌어 낼 것인지 정중하게 이제 그 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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