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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풍에 눈 녹는다'는 속담이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동쪽의 고기압으로부터 비교적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추위가 풀린다는 뜻이다. 과연 어느 사이인가 매서운 북서풍이 시나브로 스러지고 한결 부드러워진 동풍이 불고 있다.

 동풍을 순 우리말로 샛바람이라고 한다. 이 샛바람이 태백산맥의 높은 봉우리를 넘어 불어오는 것이 높새바람이다. 높은 산맥을 넘으면서 산맥의 동쪽 면에 비를 뿌리고, 산맥을 넘어서는 건조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봄철 가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높새바람에 보리 끝이 마른다'는 속담도 있다. 여름이 되면 남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쪽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남풍을 뱃사람들은 마파람이라고 불렀다. '마파람에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는 속담이 있다. 따뜻한 남풍이 불면 가을의 결실을 위해 곡식들이 놀랄 만큼 빨리 자라 익어간다는 뜻이다. 가을이 되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서풍이 불어온다. 서풍은 하늬바람, 혹은 가을바람이란 뜻으로 갈바람이라고도 불린다. 여름의 마파람에 혀를 빼물고 자란 곡식은 하늬바람에 모질어진다. 가을이 되어 곡식의 알이 단단하게 여물게 되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바람의 방향이 다시 바뀌어 매섭고 거센 북풍인 된바람이 분다.

 바람은 계절과 방향 뿐 아니라 세기, 장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실바람, 산들바람, 남실바람, 간들바람은 살랑살랑 부는 미풍을 뜻한다. 바람이 좀 더 세지면 소소리바람과 흔들바람, 건들바람이 된다. 그리고 겨울의 삭풍이나 강풍은 칼바람, 고추바람이라 불린다. 이른 봄엔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불고, 보리누름철엔 흙가루가 날리는 흙바람이 분다.

 틈새로 부는 바람은 틈바람이라 하는데 틈바람 가운데 이른 봄에 차갑게 부는 틈바람을 살바람, 좁은 틈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을 황소바람이라고 한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 온다'는 속담이 있는데 작은 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듯, 작은 바람에도 마음이 시려지는 서민들의 애환을 뜻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윗목의 문풍지나 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기운을 웃바람이라고 한다. 갑작스럽게 부는 돌풍은 돌개바람,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역풍은 맞바람이다.

 그 뿐인가. 산에서 부는 산바람, 골짜기에서 부는 골바람, 들에 부는 들바람, 대나무 잎을 서걱거리게 하는 댓바람, 솔잎을 흔드는 솔바람이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은 짭조름한 갯냄새를 몰고 오고, 꽃이 피는 봄철엔 꽃향기를 실은 꽃바람이 분다. 또한 비나 눈을 몰아오는 흘레바람이 있다.

 솔바람은 '송뢰'라고도 하는데 소나무에서 나는 퉁소 소리란 뜻이다. 자연을 하나의 커다란 악기로 여긴 운치 있는 이름이다. 바람 솔솔 부는 소나무 아래에서 보글보글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거문고의 줄을 고르는 선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마 선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바람의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바람을 가까이 관찰하며 바람과 더불어, 바람에 친숙하게 몸을 맡기며 살아왔음을 뜻한다. 눈과 더불어 살아가는 에스키모인들에게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가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바람과 같은 기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엔 이 많은 바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분명 바람은 지금도 불어오지만 바람을 표현하는 우리말들은 거의 사라지고 우리는 태풍, 토네이도, 허리케인, 블리자드 같은 자극적인 외국 단어에 익숙하다. 그리고 아침에 밖을 내다보며 황사바람이 부는지 마스크를 준비해야 하는지 걱정하는 것이다. 물론 농사 짓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산업이 다각화 되면서 날씨에 덜 민감하게 되고, 지구온난화니 이상 기온이니 해서 기후의 변화가 심해진 탓도 있겠지만, 실바람의 결처럼 섬세하고 고운 우리말이 사라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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