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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이울고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지고 벚꽃이 한바탕 울산 천지를 뒤덮고 나면 바라봐 주는 이도 없이 쓸쓸히 천지를 뒤덮는 꽃이 있다. 배꽃이 그들이다. 꽃샘추위에 떨다 혼자 피어 있는 백목련은 떠나간 애인 같아 떨리는 가슴 속으로 애린 생각이 자꾸 올라오지만, 봄비라도 다녀간 다음날 함초롬히 빗방울을 이고 있는 봄까치꽃이나 노랗게 피어 방그레 웃는 민들레꽃이라도 대하고 있을라치면 마음은 고향으로 줄달음친다.

 내 고향 대현면 매암리. 봄이면 배꽃이 지천으로 피던 내 고향은 납도 매암 여천 산안에 걸쳐 약 75 가호가 일군 수만 평 배 밭,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배 산지였다. 울산 배의 유명세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울산 토산물 중 배가 포함돼 있다는 기록이 증명해주고, 일제 강점기에 구라까다(倉方)라는 일본인 농학박사에 의해 식재돼 이것을 단초로 한 집 한 집 번져가 공단에 수용되기 전까지 전국 최고의 배 주산지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곳이다.

 원래 울산 토양은 다른 곳과 달리 무를 심어도 달고 단단하고 저장성이 좋아 조선 시대에는 나라님 진상 무로 선정되었다 하고, 배 역시 맛이 깊고 달고 단단하여 냉장 시설이 없던 그때로선 최상의 상품으로 대접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 아무리 간소하게 차린 제상이라 해도 배 한 알은 올렸으니 숱한 과일 쏟아지는 흔한 과일 중 하나인 요즘의 배와는 차원이 다른 배였다고 할 수 있다.

 대현, 큰 고개. 말 그대로 대현의 지형은 고개를 따라 길이 약간 높게 위치하고 과수원은 바람을 피해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 배꽃이 피었을 때를 떠올려보라. 내려다보면 숨 막히는 하얀 배꽃 바다가 펼쳐져 마을이 꽃 위에 떠 있는 듯 했으니 봄날에는 나날이 무릉도원이었다. 만개한 배꽃 위로 은은한 달빛이라도 내리면 그 신비하고 몽환적 분위기는 먼 먼 이국의 숲속 같았다. 이 꽃철에 처녀 총각들은 잠들지 못하고 과수원 사이 길을 헤매어 다니고 뜻 모르는 아이들까지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어른들이 부르러 올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으니 꽃이 피면 마을은 조용한 축제로 들떠 있었다. 꽃이 무르익어 소리도 없이 져 내릴 때는 또 어떠했던가. 바람이 꽃잎을 몰고 가듯 흩날리는 배꽃 모습은 가히 숨 막힐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가끔 지는 배꽃에서 재종숙모님의 뒷모습을 보곤 했으니, 시집 온 지 십 년만에 청상이 되신 숙모님의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은 아련한 배꽃을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사실 내 고향의 봄은 이원수님의 '고향의 봄'보다 더 아름다운 꽃 천지였다. 배꽃만 꽃이었으랴. 사과 꽃 복숭아 꽃 살구 꽃 매화에 노란 장다리꽃, 새치름한 연보라 무꽃, 묵정밭에 보얗게 깔린 냉이 꽃, 밭둑에 넘쳐나는 봄까치꽃, 길가에 달큼하게 웃고 있는 민들레꽃, 소복소복 피어나던 하얗고 진보랏빛 오랑캐꽃…이 꽃들을 밟아야 친구 집에 닿을 수 있었고, 이 꽃을 지나야 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 우린 그냥 꽃동산에 살았었다고 말할 밖에.

 배 밭이 그립다, 이 말을 어머니 앞에서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과수원 일이 너무 많아 일에 파묻혀 살던 어머니는 배를 잘 드시지 않았다. 그런 걸 번연히 알고도 어머니 등 뒤에서 나는 배 밭의 모든 것이 그립기만 했었다. 한량이던 아버지는 배꽃 피는 철이면 늦은 외출에서 돌아와 사랑채 불을 끄시고는 이조년의 시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시조 가락을 수없이 되풀이 읊었고 나는 뜻도 모르면서 흥얼흥얼 따라 읊으면서 잠이 들었고, 때로 초당에 있는 아재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문 열고 목침 위에 머리 얹고 시조 가락을 듣던 모습도 떠오른다. 어쩌면 육이오 동란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어둠 속에서 눈물을 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 배 밭, 배꽃이 이울면 배를 솎아내고 봉지를 씌우고 그럴 때쯤 배나무 이파리의 그 여디리여린 새 잎의 찬란함을 잊을 수 없다. 곱씹고 되씹어도 아름답고 그리운 대현면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 한다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우람한 공장 굴뚝들이 선 내 남편의 내 아들의 일터쯤으로만 떠올려질 터이니, 생업의 현장으로야 더 없이 든든한 곳이겠지만 가끔은 그 일터가 깔고 앉은 그 땅을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한 번쯤 떠올려주면 좋겠다. 그곳에 배꽃 지천으로 피던 아름다운 고향의 대명사 같은 대현면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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