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현리에서 운흥사터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웅촌지역 모습. 사진의 가운데(저수지 너머)가 환호 주거유적이 발견된 대대리 유적이고, 왼쪽은 웅촌지역의 주산인 운암산, 오른쪽 공단지역을 지나면  갓골과 '울산'이란 지명의 시원이 된 웅상 우불산이 나온다. 사진=이창균기자 photo@
울산이란 지명의 옛 뿌리를 찾아 우시산국의 중심이었던 웅촌 지역으로 향한다. 울산 무거동에선 20분, 웅상 우불산신사(于弗山神祠)에서는 하천을 따라 그어진 시 경계를 넘으면 바로 웅촌이다.
 우불신사를 찾아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제례를 올린 옛 울산인들의 삶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 흔적을 찾아 나서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렌다. 그러나 설렘이 안타까움으로 변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불산에서 북쪽 웅촌 검단리 방향으로 난 도로변에는 공장들이 즐비하다. 공단으로 지정된 마을에는 도로를 넓히기 위해 꽂아 놓은 붉은 표지 깃발이 가득하다. 울산이란 이름의 시원이 된 웅촌은 지금 공단개발이라는 미명 속에 시나브로 콘크리트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울산 지명의 시원이 된 웅촌지역
검단리 등 3천년전 울산인 집단 주거지로 추정
지금은 개발 미명 속 잿빛 공장지대로 탈바꿈
선사유적 보존·관광자원화 위한 지원 필요

#검단리유적
웅촌 지역의 대표적 선사주거 유적인 '검단리유적'을 가리키는 팻말을 발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표지판에서 농로와 산길을 따라 찾아 들어간 '검단리유적'은 이 지역의 유적들이 얼마나 홀대를 받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초입의 좁은 진입로는 공장들에 의해 막혔고, 유적지로 가는 오솔길 앞에까지 커다란 공장이 들어섰다. 오솔길을 비집고 올라간 유적지에는 커다란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이 아니었더라면 이 구릉이 3,000년 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90년 검단리 유적 발굴당시의 모습. 지금은 흙으로 덮혀 표지판만 남아있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검단리유적은 인근 골프장 확장공사를 하다가 발견됐다. 1990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능선의 정상부분과 비탈진 면을 감싼 형태의 환호와 환호 안팎에 흩어진 채 분포한 청동기 사람들의 주거지와 건물지 93동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안팎에서는 구멍무늬토기, 돌화살촉, 돌도끼, 방추차, 어망추, 반달모양 돌칼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주거지 주변에서 고인돌 2기와 석관묘 1기도 발견되었다.
 검단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환호취락유적이다. 이 유적이 사적 323호로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호는 외부로부터 내부주거지를 구분하여 경계 짓고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검단리유적은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은 상태여서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안내판의 그림과 설명을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취재에 동행한 한삼건 교수(울산대 건축학부)는 "검단리유적은 적어도 3,000여 년 전에 이곳이 울산인들의 집단 주거지 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검단리유적은 물론 이 유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일대가 공단으로 지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교수는 검단리유적은 일본 야요이시대의 유적지로 판단되는 요시노가리 유적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니는 곳이라고 전했다.
 

 일본 야오이시대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역 600년간으로 일본인들이 식량을 채취하는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사회로 발전하는 시기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지난 1990년대 초 검단리 유적과 비슷한 시기 공업개발 계획 때문에 우연히 발굴됐다. 유적이 발견되자 공업개발 계획은 유보되었고, 지자체와 지역민들은 유적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도시는 읍 규모로 커지고, 역도 생겼다. 발굴 당시 한해 100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요시노가리 유적은 지금도 한해 수십만 명이 찾는 야요이시대를 대표하는 유명관광지로 탈바꿈해 있다.
 한 교수는 "검단리유적은 한반도의 선사문화 유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울산의 고대 문화 중심이다"면서 "웅촌면 일대의 유적을 적극 발굴해 선사문화중심공간으로 특화·개발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갓골
검단리 유적에서 나와 남쪽 갓골(관동골)로 향했다. 갓골은 검단리 유적에서 남쪽 둔덕 하나를 넘은 곳에 위치하는 곳으로 우시산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갓골에는 조선시대까지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얼마 전까지 마을 옛 가옥 사이에 성벽의 흔적이 있었고, 성벽을 설명하는 안내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단으로 지정된 이후 한집 한집 허물어져 가면서 성벽의 흔적은 사라져버렸다. 조만간 마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한 교수는 "갓골은 옛 웅촌과 웅상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우시산국의 지리적 중심으로 추정되는 곳이고, 농지에서 벗어난 구릉지에 위치해 방호하기 쉬운 위치여서 집단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 갓골은 웅촌 지역의 진산인 운암산과 제례의식을 지내던 웅상 우불산과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다. 갓골에서 보면 남쪽에 우불산이 신령스런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고구려 세력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은현리 적석총.

#은현리 적석총
고대국가 시절 웅촌 지역의 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흔적이 은현리 적석총 유적이다.
 적석총은 검단리 유적에서 북쪽, 천성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검단삼거리에서 검단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학교 앞에서 '은현리 적석총' 푯말을 따라가면 전원주택이 끝나는 지점에서 커다란 돌무더기를 만날 수 있다.
 고구려의 무덤형태인 적석총이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채롭다. 학자들은 이 돌무덤은 5세기 초 신라가 가야와 왜의 연합세력으로부터 심각한 공격을 받았을 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냈다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해 설명한다. 고구려와 관련된 인물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적석총이 울산의 고대사회를 복원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대대리유적
드넓은 웅촌 분지를 나와 웅상지역으로 간 후 다시 국도를 타고 울산 쪽으로 오면 웅촌면 대대리다.
 이곳에서는 지난 1991년과 1992년 부산대박물관이 2차에 걸쳐 발굴한 하대(下垈) 고분 유적이 곳곳에 분포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세발 달린 청동솥(銅鼎·세발솥)은 웅촌지역에 터를 잡아 번성했던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대대리 하대마을에서 저리마을 방향으로 시대순으로 형성된 원삼국시대 무덤들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이것들은 널무덤(토광목곽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독무덤(옹관묘)들로 확인되었고, 청동솥을 비롯 연질·도질토기와 쇠칼·쇠창 같은 철제 무기류와 옥장신구의 출토 유물로 보아 시기를 3∼7세기 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에따라 무덤 주인공들은 우시산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사람들로 추측된다. 대대리 무덤은 고대 울산지역의 사회와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몫을 하는 무덤으로 평가된다.
 한 교수는 "세발솥은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부장품인데 대대리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우시산국 시절, 대대리 유적에는 상당한 정치적 권위와 신분이 높은 특권층이 있었으며, 그들이 대외 교역을 주도했던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울산지명의 기원이 된 우시산국의 중심지였던 웅촌 지역에 산재한 유적들은 울산지역 고대 사회와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부울 국도변에 방치되어 있다시피한 웅촌 대대리의 한 고분.

 하지만 울산의 변방으로 전락한 이 지역은 지금 지자체와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4세기까지 고대국가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의 유적들은 공단개발이라는 미명 속에 사라져가고 있다.
 울산 정명 600년을 맞아 웅촌 지역의 선사유적을 보존, 관광자원화를 위한 단체장의 의지와 재정지원은 물론 유적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과 보존의지가 필요해 보인다. 강정원기자 mikang@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