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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사적지정 20여년만에 이뤄진 첫 대규모 시·발굴조사에서 병영성의 체성일부 외벽과 치성 부분 등이 확인됐다. 발굴조사 관계자들이 현장을 둘러보며 설명을 하고 있다. 이창균기자 photo@

사적 제320호인 병영성은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있었던 곳으로, 1417년(태종 17년)에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타원형의 둘레 약 1.2㎞, 높이 약 3.7m 규모로 쌓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읍성이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고, 문에는 옹성을 두었던 흔적이 있으며, 사방 8m 크기의 치성이 군데군데 있는 등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졌음이 확인된다. 그 후 세종대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적대, 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성의 둘레는 1.2km, 높이는 3.7m이고, 성 안에는 우물, 도랑, 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성돌은 임진왜란 이후에 왜성을 쌓을 때 많이 없어졌으나 기단부는 대부분이 남아 있다.
 성벽은 구릉의 정상을 안쪽으로 하고, 바깥 경사면에 7m 두께로 기단을 둔 다음, 기단에서 50㎝쯤 안쪽으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며, 내부는 잡석으로 채웠다. 바깥 쪽 가파르지 않은 곳에는 10m 밖으로 폭 8m, 깊이 2m인 해자를 둘러 팠던 자취가 남아 있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진이 설치되어 군사가 주둔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 이 진을 잠시 경주로 옮겼다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제자리로 옮겨와 경상좌도의 병마도절제사의 주둔처가 되었다. 처음에는 옛 울산읍성과 병영이 한 곳에 있다가 분리와 합병을 되풀이하였다. 당시의 방어전략에 따르면 염포·개운포·서생포 등으로 침입하는 왜적은 수군이 막고, 육지로 상륙한 왜적은 이곳 병영성에서 막았다.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는 지난해 병영성 북문지~서문지 사이의 성벽과 서문지 옹성, 해자, 문루건물지, 치성 3개소 등을 발굴했다. 병영성이 정비·복원되면 조선시대 전기 성곽 연구에도 중요한 학술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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