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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이 있는 세죽포구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지만 지금은 울산공단에 둘러싸인 작은 섬이다. 지금의 처용암은 오염과 매립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1,000년전 최초의 아랍인으로 추측되는 처용과의 인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신라시대 울산은 천년왕국의 중심지인 경주의 물류 중심지였다. 국제무역항을 가진 울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거점 배후지였고 상권의 중심지였다.
 

   국제적인 물류 거래가 활발했던 울산은 아랍과 무역을 할 정도로 큰 국제 항구도시였기에 외국의 새 문물을 빨리접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울산의 상징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아랍인으로 추측되는 '처용'이다.
 

 처용암은 울산의 서남쪽에 있는 온산공업단지 입구 남구 황성동 외황용강 하구의 개운포에 있다. 처용암은 용의 아들이라는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는 바위섬으로 향가 '처용가'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처용암이 있는 세죽포구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지만 지금은 울산공단에 둘러싸인 작은 섬이다. 지금의 처용암은 오염과 매립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1,000년전 최초의 아랍인으로 추측되는 처용과의 인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전해지는 처용설화는 다음과 같다.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을 하나 하였다.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처용이 노래와 춤을 잘하고 용의 아들을 자처하며 역신을 내쫓았다는 것을 보면 처용은 무속적 성격을 지닌 인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은 처용에게 아내와 벼슬자리까지 주면서 자기 곁에 두고 왕실의 안녕과 병마를 내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을 용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처용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실제로는 당시 울산 지방에 있었던 호족(豪族)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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