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낭송 하면 아직은 가요나 민요와 같이 어떤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안다. 요즘은 문학행사나 축하행사 등에서 시낭송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여 한편 듣는 것만으로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낭송은 우리 생활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낭송은 역사를 살펴본다면 역사 이전부터 태초의 말이 있었다면 말과 함께 시가 생겼으며 문자의 시 이전 구송된 것이 시낭송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오딧세이) '연회장에서 시인의 시가 참석한 사람들의 귀를 홀려 있는 동안 식탁에는 빵과 고기가 가득 채워질 때 이 때 만큼 가까운 극락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매년 7월 아테네 여신을 제사지내는 판아테나이아라는 축제가 열렸고 이것을 확대 계승하여 4년마다 대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열었으며 이때 운동 경기, 음악 경연과 함께 시낭송 경연대회가 펼쳐졌다.


 고대 그리스의 페레포네소스 전쟁 때 시크라사를 공격한 니카아스의 아테네군이 패배한 뒤 포로가 된 아테네인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낭독해 주고 생활비를 벌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기원전 11세기경 우고대 중국의 주(周)왕조는 문왕이 창건, 문왕의 어머니 태임은 문왕을 잉태 후 밤이면 맹인 악관을 불러 시를 읊게 했으며 기원전 6세기경 공자(시경) 거리에서 낭송되어 온 시들을 모음 채시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미간에게서 낭송되는 시를 채집해 민심을 읽었다.  


 역사상으로 시를 가장 많이 암송한 사람은 이슬람의 알 흐와리즈미(934~993)일 것이다. 장 자크 루소도 시의 암송자였다. 그의 '고백록'에는 시를 연습하는 대목이 나오며 그가 파리에 살 때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로마시인) 시집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공원을 산보 할 때나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외우고 또 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시낭송은 언제부터였을까? 고려 충숙왕 때부터였으며 예부터 선비의 기본 요건이 시 암송이었지만 과거 응시자에게 처음으로 시를 암송하게 했으며 율시사운(律詩四韻) 100수를 외워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나라 시낭송 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면 광복 직후 시인들이 자작시를 낭독하면서 자작시 낭독회가 만들어졌으며 1948년 대지백화점 2층에 그 당시 주인이었던 박거영 시인이 '시낭독 연구회'라는 간판을 걸고 그때 함께한 시인은 오장환, 이용악, 이병철 등 좌경시인들이 참여해 낭독회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오장완 시인은 '병든 서울','헌시' 등 자작시 낭독을 하여 장안의 여학생들에게 인기를 크게 끌었으며 좌경 시인들은 낭독회를 통해 민중을 선동하는 마당으로 이용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모두 월북하여 낭독회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임시수도 부산.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의 시낭독회인 '현역 시인 33인 시낭독회'가 1952년 12월 피란 온 이화여대의 가건물 강당에서 열였다.
 독립선언서의 33인에 맞춘 참여시인 33인 중에는 박인환, 김수영, 김종문, 양명문, 조병화, 노천명, 모윤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낭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우리의 태초부터 아주 깊숙이 들어 와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외면하고 살지는 안았나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0편이 넘는 시를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100명 중 5편을 제대로 외는 사람이 5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입사 면접에서 있었던 일이다.


 낭송으로서 독자적인 한편의 詩가 수백 수천 명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살아있는 울산이 되기를 희망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