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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정원박람회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은 집 뒤에 정원을 두고 어디를 가느냐고 핀잔이다. 하긴 내가 사는 아파트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문을 열면 바로 산이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까불까불 춤을 추는 것이 보이고 산새들은 호잇호잇 울면서 스칠 듯이 날아간다. 봄이면 산벚나무가 꽃 대궐을 이루고 가을이면 단풍이 타오르듯 붉다. 하지만 아무리 산이 가까이 있어 눈과 귀가 호강을 해도 가끔씩은 나만의 정원을 갖고 싶은 것이다.


 정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집 안의 뜰이나 꽃밭'이라고 나와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에는 마당과 뒤뜰에 꽃밭이 있었지만 그게 정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뒤뜰엔 제법 큰 감나무 한 그루와 모과나무, 가죽나무, 들장미가 있었고, 맨드라미가 심어진 장독대와 작은 오빠가 누워서 역기를 들던 긴 의자 비슷한 게 있었다. 감나무 옆엔 커다란 미국자리공(우리는 '장록'이라고 부르던)이 나있어서 검붉은 열매를 손으로 으깨며 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넓은 앞마당. 나중에 어머니는 논을 팔고 타작할 일이 없어지자 앞마당에 상추를 심으셨는데, 그 전까진 마당에서 타작도 하고 고추며 콩이며 들깨며 온갖 것을 널어 말렸다.


 이게 정원이었을까. 정원이란 좀 더 근사하고 멋있어야 되지 않을까.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잔디가 깔려 있고, 잔디 사이로 돌길이 놓여 있고, 잘 손질된 향나무와 파라솔이 꽂혀 있는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가끔씩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는. 일요일엔 긴 호스로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잘 생긴 애완견이 뛰노는 그런 곳이 정원이 아닐까.


 몇 해 전에 비원과 소쇄원에 간 적이 있다. 창경궁의 후원인 비원은 우리나라 궁궐 정원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이고, 담양의 소쇄원은 양반집 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두 정원을 둘러보고 느낀 점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수양버들 가지는 축 늘어져 있고, 연못엔 떨어진 낙엽이 둥둥 떠다니며, 물길은 바위 사이를 지나고, 길은 울퉁불퉁하고 좁다랬다.

   특히 소쇄원은 산기슭의 계곡을 끼고 있어서, 정원을 일부러 가꾼 것인지 그냥 산을 일구고 정자를 지은 것인지 엄밀히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라 자연 속에 깃들여 산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원은 서양에서 발달했다. 서양의 궁궐이나 성에는 넓은 잔디밭과 분수를 두고 정원사가 다듬은 나무들이 원이나 대칭을 이루면서 기하학적으로 서있는 경우가 많다. 나무나 꽃들에 인공적인 손질을 해서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원을 저택의 전면에 배치하고 자신들의 세력과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원래 우리나라에선 마당 한가운데에 나무를 심으면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곤궁할 곤(困)자가 마당에 나무를 심은 모양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번잡한 것을 피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정원을 뒤뜰에 마련하여 소요와 완상을 즐겼다.

   비원이나 소쇄원이 그러하고, 아름다운 굴뚝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후원인 아미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마 산업구조의 변화로 마당의 효용이 줄어들면서부터겠지만, 마당에 정원을 꾸미고 잔디를 깔기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나무 사이로 멋진 집의 현관이 보인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은 부자이기 십상이니 글자의 모양에서 비롯된 옛사람들의 믿음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한국식이든 서양식이든 정원이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정원이 있다면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삶의 활력소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갖고 싶은 정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원은 잘 다듬어진 정원수와 기암괴석, 기화요초가 있는 정원이 아니라, 감나무 아래 평상이 놓인 뒤뜰이다.

   감꽃이 떨어지면 실에 꿰어 감꽃목걸이를 만들고, 평상에 앉아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는 것을 보고 싶다. 아, 감나무 옆엔 산수유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어야지. 그리고 '낙엽을 태우며'란 이효석의 수필에서처럼 고요히 내려 쌓인 낙엽을 긁어모아 태우며 사위어가는 불길에 손을 쬐고, '갓 볶아낸 커피와 잘 익은 개암 냄새' 같다는 연기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사람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정원이 있는 넓은 집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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