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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원 달러만 주세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공항을 벗어난 후 처음 만난 소녀가 낯선 이방인에게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구걸했다. '아이들의 구걸에 응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를 돕는 것'이라는 가이드의 사전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최빈국 캄보디아는 한때 크메르제국의 영광을 구가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생활, 크메르루주 치하 등 현대사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거리로 내몰린 부모들이 아이들을 구걸로 내몰고, 이로 인해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꿈을 펼치지 못하는 악순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프놈펜은 세계 여느 여행지든 쉽게 볼 수 있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왕궁을 보면서도 옛 시절 누렸던 영화보다는 현재의 궁핍한 현실의 그늘을 지울 수가 없었다. 크메르루주 시절 고문 장소였던 박물관과 킬링필드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다.
 

   
툴슬랭 감옥박물관 마당에 위치한 고문 희생자들의 묘. 이들은 베트남 군이 진입할 당시 고문실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 고문의 현장 - 툴슬랭 감옥박물관

크메르루주의 폴포트 정권의 툴슬랭 감옥은 'S 21'(Security office-21)로 불리는 고문 장소였다. 이곳은 원래 '행복한 나무'를 뜻하는 툴슬랭 프레이(Toul Sleng Prey)라는 이름의 고등학교였다.
 크메르루주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며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공산주의 단체다.
 크메르루주의 지도자였던 폴포트는 공산주의와 집단농업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노동시키고 학살했다. 
 

   
청아익에 세워진 추모탑에 쌓인 학살 의생자들의 유골.

 시가지에 위치한 이곳에 들어서면 10여개의 무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79년 베트남군이 진입할 당시 고문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들의 무덤이다. 이들의 주검이 발견된 고문실에는 낡은 철제 침대와 탄약통으로 만든 변기와 족쇄 등이 그대로 놓여있다.
 벽면에는 발견 당시 촬영했던 참혹한 사진이 걸려있다. 이 방에서는 숱한 고문이 자행됐다. 지식인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혀 고문의 대상이 됐다. 4년 동안 2만여 명이 수용됐고, 대부분 청아익(Choeung Ek) '킬링필드'에서 죽음을 맞았다. 
 

 4층 규모의 각 건물 벽면에는 당시 설치한 철망이 남아 있다. 이 철망은 '고통을 못 이겨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발톱을 뽑고, 물고문을 하는 고문 틀도 있다. 수감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찍어두었던 수많은 이들의 사진 앞에서 여행자는 넋을 잃었다. 이곳에 수감됐던 수감자들은 거의 모두 사형처분을 받고 '킬링필드'인 청아익으로 옮겨져 잔혹하게 숨져갔다.
 
# 킬링필드 - 청아익

프놈펜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청아익은 크메르루주 정권하에 지식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장소이자 매장지다. 이곳은 캄보디아 내의 300여개 킬링필드 중 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캄보디아 사찰 지붕모양을 한 위령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행자들은 각 나라 언어로 된 안내 장치를 차고 위령탑 주위에 배치된 각 권역으로 움직이며 이어폰을 통해 설명을 듣는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한 구간을 다 지나기 전에 말문을 닫고, 마치 수행을 하듯 긴 침묵의 여행을 시작한다.
 

   
'킬링필드'의 상징이 된 청아익 지구의 학살자 발굴 현장을 둘러보는 박맹우 시장 일행. 지붕이 있는 곳이 수백명의 유해가 발굴된 웅덩이고, 그 옆 나무가 어린아이들을 참혹하게 죽이는데 이용된 '킬링트리'다.

 여행자들은 곧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든 웅덩이를 만나고, 그 곳에서 수백 개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설명에 경악한다. 그리고 '킬링트리'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인간의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된다.
 '킬링트리'는 어른들이 갓난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학살하던 나무였다고 한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조차 아깝다며 낫과 곡괭이로 머리를 찍고, 칼로 찌르고, 야자나무로 만든 칼로 머리를 자르고, 교수형에 처하고, 심지어는 집단 생매장까지 자행했다.
 

 그들은 학살도중 혁명가와 발전기를 돌리는 기계음으로 비명소리를 은폐했다고 한다. 1979년 발굴 당시 86개의 웅덩이에서 9,000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추모탑 내부는 정사각형 하얀 벽 안에 유리로 둘러싸인 유골 안치대가 높게 서 있다.
 유골의 대부분은 아래턱이 훼손돼 있고, 낫으로 찍혀 처형당한 듯 두개골 정면에 선명한 흔적이 있는 것도 있다. 박물관엔 발굴 당시의 사진들과 담시의 참혹함을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희생자들이 집단으로 발견된 웅덩이.

# 화려함의 극치 - 캄보디아 왕궁

프놈펜 시가지 톤레사프 강에 위치한 황금색 왕궁(Royal Palace)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왕궁 밖에서 갓난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소녀의 모습과 이 왕궁의 화려함은 캄보디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1866년에 건설된 이 왕궁에는 현재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 살고 있다. 시하모니 국왕은 부친인 시아누크 국왕이 2004년 10월 14일 퇴위한 이후 왕위를 계승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캄보디아 왕궁의 일부.

 왕궁 옆엔 실버 파고다(Silver Pagoda)가 있다. 1998년까지는 관광객에게 실버 파고다만 개방했으며, 이듬해부터는 왕궁의 일부 지역까지 개방하고 있다.
 왕궁의 입구는 정문에서 약간 남쪽(왕궁과 실버 파고다 중간쯤)에 위치해 왕궁으로 들어가서 실버 파고다를 통해 나오도록 되어 있다.
 실버 파고다 중앙 사원 실내 바닥엔 1.1㎏의 은으로 된 타일 5,000개가 깔려 있어 화려함을 자랑한다.
 

 회랑에는 캄보디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왕궁에서 나와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뉴스를 전 세계로 타전했던 장소로 유명한 FCC(외신기자클럽)건물에 들렀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군은 1979년 프놈펜을 침공해 인구 700만 명 중 200만 명 이상을 학살한 크메르루주 폴포트 정권을 무너뜨렸다. 프롬펜을 점령한 베트남군의 모습과 시민들이 환호하는 모습, 킬링필드의 참혹한 모습들이 이곳에서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
 

 이곳엔 지금 차와 음료를 판매하는 클럽이 입주해있다. 창문이 없는 클럽에서 한 외국인 기자가 톤레사프 강에서 한가로이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선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진정한 평화를 타전하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글·사진=강정원기자 m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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