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딱 한 통만."
 여자는 오늘도 손가락 하나를 내보이며 한 통의 물만 받아가겠다고 한다. 들어볼 것도 없이'노'다.
 우리 집 대문 앞 수도꼭지는 옷을 홀딱 벗고 동네 것이 되어 있다. 길가 집인데다가 대문까지 없으니 누구든 지나가다 제 것인 양 틀어댄다. 여름에는 학생들이 지나가다가 '쏴'하고 틀어서는 땀범벅이 된 머리통을 들이대고 시원하게 덮어쓰고 지나간다. 불가에서 말하는'보시'라 생각하고 보고 넘겼다. 그런데 미운털이 박힌 이웃이 있다. 한 통뿐이 아니라 여러 통의 물을 받아갔을 테지만 내게 들킬 때마다 한 통이라고 말하는 이웃 아주머니를 오늘은 용서하기가 싫다.

 우리 집 주변에는 아직 텃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군데군데 집을 지을만한 빈터가 있어서다. 그런데 유독 작달막한 키에 엉덩이가 납작한 오십 대의 아주머니는 주는 것 없이 얄밉다. 새벽운동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보면 수시로 철가방만 한 물통을 양손으로 들고 와서 물을 받는다. 처음에는 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먼저 피해 주며 지나쳤다. 하지만, 횟수가 잦아지자 슬슬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벌건 대낮에 길에서 만나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 인사하기는 더욱 싫다. 서로 눈인사라도 하면서 아는 체하고 지내면 좋을 텐데. 그러면 어디 고개라도 부러질까? 그 여자의 참나무 방망이처럼 빳빳이 세운 고개는 숙일 줄을 모른다.

 겨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수도가 얼어붙고 밭농사도 쉬기 때문이다. 봄부터 수차례 물통이 등장했다. 봄 가뭄이 심했으니 우리 수도꼭지와 면회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수도꼭지 관리를 좀 해야지 싶다. 더군다나 요즈음 방송에서는 수도요금이 인상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집 근처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목말라 하는 채소들은 한 통의 물만 줘도 금방 혈색이 살아난다. 텃밭 옆 교회 담벼락에는 수도꼭지가 버젓이 있지만, 기어이 집까지 와서 물을 길어 나른다. 어쩌면 교회 수돗물은 하느님이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남의 물로 농사를 지어 오일장에다 채소를 팔며 지내는 아주머니의 사정도 그리 넉넉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난 오일장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달랐다. 멀찍이서 보니 감자, 배추를 팔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그리도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미운털까지 박히게 되었을까 싶다. 지나가는 새댁을 보고'이모'라고 부르며 눈웃음을 짓고, 엄마 손을 잡은 아이에게까지 온갖 칭찬을 다 했다. 절대 무뚝뚝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통의 물만 받아가겠다는 말을 단박에 거절해 버리고 돌아서 버렸지만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더는 보고 넘기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고자질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은 '흠' 하는 반응이 다였다.

 나도 남들이 보기에 그 여자처럼 당당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지만, 그렇게 비겁하게 남의 물을 가져가서 농사 짓지는 않을 거라며 남편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가져간 물로 농사를 지어 오일장에서 버젓이 채소를 파는 그 여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젊어서는 유난히 부끄럼이 많아 남들 앞에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쉰을 훌쩍 넘기니 삶의 때가 묻어 부끄럼도 사라지고 주제가 많이 늘었다.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우스갯소리가 스스럼없이 나오고 어지간한 남자들이 가까이와도 당황해 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게 다 나이 들어가는 증표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모두가 맞는 말일 성 싶다. 이제 길에서 그 여자를 만난다면 먼저 말을 걸어 다시는 수돗물을 길어가지 말라고 할 용기가 생겼다.

 지난 연휴, 서울 사는 아들 내외가 다니러 왔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참 동안 부산을 떨었다. 알 만큼 아는 아들 내외 앞에서 아무 말이나 지망지망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저녁 밥상머리에서 그만 며칠 전 물통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어머니, 불교대학은 왜 다니셨습니까? 네가 먼저 베풀라는 부처님 말씀이 있었을 텐데요…." 듣고 있던 아들이 한마디 던졌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