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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 낳은 근대 인물 가운데 박상진 의사는 단연 특출하다. 그는 1884년 12월 7일 울산 송정동에서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承旨)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出系)하여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박상진 의사는 이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박상진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교수형을 당했다.
 

 박상진 의사의 항일투쟁은 척사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수용한 민족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박 의사가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표출했다.
 

 대지주의 후예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은 몰락하였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다.
 이 건물은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일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또한 2003년 안채가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상류계층의 가옥 양식으로 전체 4동으로 이루어진 목조기와집이다. 대문과 사랑채가 마주보고 있으며, 사랑채 안쪽에 13칸의 안채가 ㄱ자집 형태로으로 배치되어 있다. 4칸의 부속채와 함께 전체적으로 ㅂ자형 배치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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