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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공원의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웠다. 주변이 온통 초록이라 배롱나무의 붉은 빛이 더욱 붉다. 커다란 장미 다발이나 타오르는 횃불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여름에 피는 꽃은 대체로 붉다. 개양귀비, 능소화, 장미, 접시꽃,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칸나, 한련, 늦여름의 샐비어까지. 물론 노란 해바라기나 하얀 옥잠화, 눈빛승마처럼 다른 색의 꽃도 있지만 그래도 여름 꽃은 붉은 색이 많은 편이다. 아마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움과 꽃의 붉은 빛이 서로 조응하는가보다.

 붉은 색은 강렬하다. 피의 색이다. 그래서 흔히 혁명과 공산주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 강렬함으로, 분출하는 생명과 정열을 뜻하기도 한다. 파리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원시의 생명력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은 붉은 치마를 입거나 붉은 열매를 든 타히티 여인을 자주 그렸는데, 여인들의 피부빛을 검붉게 표현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 고갱의 그림은 마티스 같은 야수파에 영향을 주었다. 마티스의 '붉은 방'이나 '붉은 실내' '붉은 화실' 같은 그림은 붉은 색이 갖는 강렬한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붉은 군상이 원을 그리며 춤추는 모습을 그린 '춤'이란 작품엔 생명의 역동성, 환희, 충만함이 가득하다.

 또한 붉은 색은 불의 색이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정화시킨다. 그래서 붉은 빛은 귀신도 두려워하고 꺼린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이니 사실은 복을 부르는 색이다.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른다는 '원화소복'의 색이자 기쁨과 환희의 색이다. 그러므로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일생에서 가장 경사스런 일은 아마 혼례일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지만 전통 혼례에서 신부는 연지 곤지를 찍고 붉은 활옷을 입었다. 그리고 신행에 나서는 새색시의 복색은 노랑이나 초록 회장저고리에 붉은 치마이다. 모두 액을 꺼리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신부가 마련한 베갯잇이나 덮개 등엔 붉은 모란이 한두 송이 수 놓여 있기 마련인데, 모란의 꽃말이 '부귀'라서 부하고 귀하게 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붉은 모란은 액막이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액막이는 장독대까지 이어졌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장맛이므로 장을 보존하는 장독대야말로 손이 타지 않고 정갈하게 유지되어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장독에 금줄을 치거나 창호지로 하얀 버선본을 만들어 거꾸로 붙여놓기도 했지만, 맨드라미나 봉숭아 같은 붉은 색 꽃을 빙 둘러 심기도 했다. 특히 맨드라미는 뱀을 쫓는 꽃이라 하여 시골집의 장독대엔 으레 맨드라미가 여름을 지나 초가을까지 붉게 붉게 피어 있곤 하였다.

 무지개의 맨 바깥쪽에 위치하는 붉은 색은 파장이 가장 긴 색이다. 파장이 긴 색은 산란하여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는 편이다. 집중도가 높다고나 할까? 그리고 붉은 색은 파란 색, 노란 색과 더불어 삼원색으로 가장 순수한 색이다. 사신도에선 남방을 지키는 주작을 의미한다. 주작은 붉은 봉황으로, 봉황은 아무리 굶주려도 대나무 열매만을 먹고 오동나무에만 앉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조와 청렴을 상징하는 새이다. 순수한 붉은 색의 이미지와 걸맞는다. 주작과 비슷한 이미지의 새에는 서양의 불사조가 있다. 나이가 들면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자기 몸을 불사르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불사조. 이처럼 붉은 색은 모든 것을 깨끗이 하는 정화와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

 팔월이다. 팔월엔 봉숭아꽃이 한창이고, 어렸을 땐 백반을 넣고 짓찧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곤 하였다. 아주까리 잎으로 손가락을 감싸고 실로 친친 동여맨 뒤 다음 날 조심스레 풀어보면, 막혔던 혈관의 피돌기가 시작되며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하고 찌르르한 느낌이 드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손가락이 보내는 살아있다는 신호가 짧은 순간이지만 생명의 충일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눈앞엔 붉게 물든 손톱이 있는 것이다.

 팔월의 태양이 붉다. 담장 아래 칸나가 붉다. 이 염천에 구슬땀을 흘리는 근로자들의 팔뚝과 얼굴이 붉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열망이 붉다.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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