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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감촉이 서늘해진 걸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과 가장 어울리는 낱말을 꼽으라하면 '스미다'가 아닐까 한다. 스미다. 속까지 배어들다.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다/ 바람 따위가 흘러 들어간다. 찬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든다/ 마음이나 정 따위가 담겨 있다. 편지 속에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스며있다/ 절실하게 사무치다. 가슴에 스미는 외로움. 이런 말들. 그렇다면 과일에 단맛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어떤 스며듦인가. 탱자가 노랗게 물드는 것은. 붉은 단풍이 하루가 다르게 산 아래로 번지는 것은.

 스며듦은 소란하지 않다. 마실 나갔던 언니가 몰래 문을 열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 듯, 고요하게 미끄러져 들어온다. 스며듦은 단단히 결합되어 나누기 어렵다. 가까이 있던 두 나무가 연리지가 되어 물관과 체관을 공유하듯, 어느 사이 슬그머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매미의 울음 사이로 문득 여치 소리가 스며든다. 억새 잎 사이로 바람이 스며든다. 어둠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든다. 그리고 여름 사이로 가을이 스며든다.

 가을엔 으레 디자이 오사무의 <아, 가을>이란 수필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가, 가을 부의 노트를 꺼내 본다. 잠자리, 투명하다고 써 있다. …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써 있다. 초토이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도 써 있다. 코스모스, 무참이라고 써 있다. … 가을은 여름과 동시에 온다라고도 써 있다.'

 보라, 가을은 이미 여름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니. 샹들리에가 반짝거리는 화려하고 눈부신 조명이라면 등롱은 창호를 둘러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조명이다. 샹들리에는 거침이 없다.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환하고 밝은 빛이 직접 전해진다. 노출이 심한 여름과 같다. 등롱은 종이에 스며든 빛이 한 번 꺾이고 걸러서 나온다. 그래서 은은하고 깊이가 있다. 뜨거운 볕이 한 풀 꺾이고, 하늘과 대기가 깊어지는 가을과 같다.

 샹들리에는 커다란 홀이나 거실의 천장을 장식한다. 샹들리에 아래는 음악이 흐르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나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등롱은 보통 대청마루에 걸린다. 분주한 저녁이 끝나고 마루에선 다듬이질을 하거나 호청에 풀을 먹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대개는 저 혼자 마루 끝을 밝히면서 깊어가는 밤을 벗 삼아 스스로 사위어가는 것이다. 혹은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란 그림에서처럼 밤중에 은밀히 나서는 사람의 발끝을 밝히는 행등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샹들리에는 빛과 어둠의 경계가 뚜렷하다. 환한 빛의 끝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등롱은 빛과 어둠이 서로 섞이고 스며든다. 그러므로 화려하고 뜨거운 열기가 넘치는 여름은 샹들리에에, 고즈넉하고 쓸쓸한 가을은 등롱에 비유한 것이다. 등롱의 빛은 등잔 빛과 닮았다. 고향의 옛집엔 사랑방이 있었는데, 그 방은 평소 큰오빠가 사용했다. 한밤 오줌이 마려워 밖에 나오면 큰오빠는 그때까지 잠을 안 자는지 창호지를 바른 방문을 통해 은은한 등잔 빛이 배어 나왔다. 댓돌을 지나 마당을 희미하게 비추는 그 빛은, 귀뚜라미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적막한 가을밤 혼자 마당을 가로질러 변소를 다녀와야 하는 무서움을 덜어주었다.

 지금처럼 가로등이나 전등 빛이 없어 어둠이 한결 짙었던 그 시절, 오빠 방에서 스며 나오던 등잔 빛은 드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외로워 보이면서도, 남루한 집안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기도 하였다. 그 때는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우리 집도 큰오빠가 희망이자 대들보였고, 오빠는 거기에 부응해 밤늦도록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공부를 했던 것이다.

 창호로 빛이 스며 나오던 옛집도, 수재 소리를 들으며 공부로 일가를 이룰 줄 알았던 큰오빠도 이젠 없다. 옛집은 내가 스무 살 무렵 창문마다 유리를 끼운 양옥으로 바뀌었고, 병약하던 큰오빠는 지병으로 오래 고생하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깊어가는 가을 밤, 문득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보면 밤새의 울음소리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 듯, 기억의 틈 사이로 큰오빠 방의 노란 등잔 빛이 스며드는 것이다. 한 송이 달맞이꽃 같던, 세상으로 나가는 열린 문 같던, 아, 가을밤의 어둠으로 스며들면서도 어둠을 몰아내는 최후의 보루 같던 그 한 줄기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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