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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으니 어깨가 서늘하다. 얇은 윗옷을 찾아 어깨에 걸치고 달력을 보니 해 놓은 일도 없이 어느새 상강을 지났다. 참 빨리 멀리도 흘러왔구나 싶다. 바람도 지나간 후에야 바람이 보인다더니 계절도 인생도 그런가.

 가을의 마지막 절기 상강을 지나고 보니 비로소 나를 스쳐간 시간들이 보인다.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시간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빈 손이어서라기 보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욕심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해질 무렵 강변 메타세쿼이아 가지 사이로 듬성듬성 붉은 하늘이 올려다 보였다. 자주 이 길을 오가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는데 나무들이 봄보다 흠씬 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둥근 향나무도 넝쿨 식물들도 넓이를 넉넉히 번져 놓았다. 붉은 노을은 낮게 포복하듯 퍼져 태화강 위에도 붉은 자락을 드리우고 그것을 받아 안은 강물은 잔잔히 뒤채고 있었다. 갑자기 낯선 곳에 와 버린 듯 가로수며 강변의 꽃이며 풀이며 도심까지 모두 달라져 보였다. 눈을 껌뻑이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나무와 풀들은 하늘 아래 노찬풍숙하면서도 봄부터 벌레와 비바람을 견디고 타는 듯한 여름 해와 태풍을 견디며 자라고 있었나보다. 단순히 견디기만 한 줄 알았는데 쉼 없이 하늘 향해 키를 늘이고 땅을 향해 깊이를 더 하며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품이 늘어난 나무나 넝쿨이며 풀들은 발아래 저리 그늘을 늘여놓았으니 이제는 마무리를 위해 남은 시간을 걸어갈 것이다. 머잖아 소중하게 품고 있는 알곡이며 과일을 마저 내려놓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할 일을 다 해 냈다는 소명의식조차 내려놓고, 긴장을 풀며 잎들을 지워내고 겨울을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어깨에 내리는 이 상강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겨울을 맞기까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할까? 내게 올해 가을은 너무 춥다. 스무 몇 해를 늘 가까이 지내던 후배 한 사람이 급성으로 온 병으로 지금 중환자실에서 사투 중이다. 힘겨워 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가족과 주변 친지들의 심정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담당 주치의의 말 한 마디 눈빛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견디는 그녀와 그녀 가족들. 금방이라도 눈 부비고 일어날 것 같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답답하다던 그녀 남편은 '사는 게 무언가요' 하고는 허공을 향하여 빈 웃음을 짓는다. 정말 산다는 건 무얼까.

 잠시 외출 중에 만난 이런 급박한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준비도 없이 겪을 황망한 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옳단 말인가? 첫날 병원에서 돌아온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쓸데없이 늘여놓았던 너저분한 세간을 정리한 일이었다.

    답은 모르지만 인생의 가을에 당도한 내가 해낼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저 가을 나무들처럼 살던 흔적을 조금씩 지워내는 일 말고는. 그런 내가 며칠 지난 후 다급하게 꺼내놓았던 물건을 다시 집어넣을 품목이 생겼다. 도로 거두어들일 물건이 있다는 건 또 무슨 심중의 변화인 것인지….

     얼마 전에 다시 잡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당신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이며, 100가지나 1,000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100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 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그 말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진다. 여태 근심과 욕심의 그늘을 늘인 것밖에 한 일이 없는 내 흘러온 시간을 더듬어 보니 새삼 부끄럽다. 맑고 청명한 저 깊은 하늘에 대고 이불 빨래하듯 마음을 통째로 꺼내 삶고 두드리고 비벼 빨아서 하얗게 바래진 마음을 다시 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의 병을 통해 나를 잠시 들여다 본 이 가을, 툭툭 털고 일어난 그녀와 낙엽 냄새를 맡으며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이미 흘려보낸 시간들과 한 치 앞을 모르는 내일을 이야기 하며 웃어볼 날은 언제쯤일까.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그녀가 빨리 일어나 활짝 웃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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