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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처럼 커다란 양철곰이 있다. 양철곰은 마지막 섬처럼 남은 녹지로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달려드는 것을 두 팔을 벌려 막아선다. 그 사이 작은 새떼들이 양철곰의 몸 안으로 씨앗과 열매를 부지런히 집어넣는다.

    마침내 개발에 밀려 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더미로 변하고 마지막 녹지도 사라진다. 지구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우주 열차를 타고 미지의 허공으로 떠난다. 폐허가 된 도시에 혼자 남아 양철곰은 자기 몸에 계속 물을 퍼붓는다. 양철곰의 몸은 점점 녹이 슬기 시작하고, 쓰러진 양철곰의 몸을 뚫고 초록 새싹이 돋아난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계 그림책 잔치, 브라티슬라바 비엔날레(BIB)에서 올해 어린이심사위원상을 받은 이기훈 작가의 <양철곰>의 내용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더 이상 파괴할 자연마저 없을 때 우리의 삶이 변해 가는 과정'이라고 책 소개를 하고 있는 <양철곰>은, 글자 없이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책이다. 글자는 없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로 암울한 우리의 미래 모습을 압도적으로 펼쳐 보인다.

 아이들은 제 몸을 허물어 자신들의 미래를 지켜내는 양철곰의 모습에서 요즘 유행하는, 슈퍼맨이나 토르 같은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지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오염되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느낄 테니까.

 그런데 최후의 종말을 막아내는 열쇠가 양철곰 몸 속에 든 씨앗이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씨앗을 품은 양철곰의 모습은 스발바르제도의 국제종자저장고를 떠올리게 한다. 국제종자저장고는 극심한 기상이변이나 핵전쟁, 소행성 충돌 등 전지구적 대재앙이 닥쳤을 때 살아남을 인류를 위하여, 노르웨이 정부와 국제연합 산하 세계작물다양성재단이 2008년에 만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장고이다.

    사실 식물의 멸종은 동물의 멸종에 비해 소리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녹색식물의 멸종은 생태계 그 자체를 무너뜨릴 위력을 지닌다. 저장고가 열려선 안 되겠지만 혹시 모를 '지구 최후의 날(doomsday)'을 위해 미리미리 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양철곰과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에서도, 탐사 로봇 이브의 몸에 담긴 식물이 인류 최후의 희망으로 작용한다. 쓰레기로 오염된 지구를 떠나 우주를 떠돌던 엑시엄호가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하나의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씨앗은 생명을 품은 모태이다. 씨앗 안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을 키운다. 상에 오르는 한 그릇의 밥은 씨앗이 우리에게 베푸는 공양이다. 또한 하나의 씨앗은 열 개로, 백 개로, 천 개, 만 개로 늘어나 이 세상을 초록으로 가득 차게 한다. 

    앨런 외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을 보면  인간이 사라진 뒤에 농작물이 야생의 상태, 그러니까 인간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는 20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500년이 지나면 온대지역의 경우, 인간이 개발되기 전의 미지의 숲을 처음 보았을 때의 상태로 회복된다고 한다.

 씨앗은 이처럼 놀라운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씨앗의 생명은 단단한 껍질에 싸여 그 껍질을 열고 새싹을 틔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타임캡슐이다. 몇 해 전에는 700년 전 고려시대의 연꽃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가장 오래된 씨앗으로는, 이스라엘의 마사다 유적에서 발견된 2000여 년 전 대추야자가 발아에 성공했다고 한다. 연구진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오래 산 인물인 '므두셀라'의 이름을 그 싹에 붙여주었다. '므두셀라'는, 방주를 만들어 생명체의 절멸을 막은 노아의 할아버지로 969년을 살았다고 한다.

 '므두셀라'란 발음은 우리 귀에 마치 '모두 살라'처럼 들린다. 모두 살라. 이거야 말로 조건 없이 모두에게 내리는 정언 명령의 형태 아닌가. 정언 명령은 우리가 지켜야 할 당위의 의무이다. 동식물, 인간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모두 어울려 살아라.

    엑시엄호를 타고 황금별을 찾아 떠나야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씨앗 한 톨 심는 마음으로, 새싹 하나 가꾸는 마음으로, 나무 한 그루 돌보는 마음으로 그렇게, 어우러져, 모두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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