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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씨끌하다. 장성택을 찍어낸 김정은이 '백두혈통'을 보다 견고히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부에 의한 새로운 '정변'이 모색되고 있다는 설도 나돈다. 평양을 잘 아는 소식통들은 이번 장성택 찍어내기의 배후에는 군부 실세가 있고 이들의 최종 목표는 김정은을 제거하는데 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나돌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 이야기가 흘러나올 상황이면 평양의 내부 사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피로 시작한 정권이 피로 끝나는 상황은 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진 역사의 교훈이다. 문제는 일련의 북한발 뉴스를 통해 우리가 우려하는 사실은 위태로운 저들의 총부리가 저들 스스로를 겨누지 않고 돌출적이고 충동적인 도발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피를 봐야 유지되는 권력은 언제나 벌겋게 달아올라 있기 마련이다. 흥분과 동요로 파동을 치는 권좌는 불안하다. 그래서 독재의 눈앞에는 2인자가 없기 마련이다. 중국의 경우 40여 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른 마오가 가오강과 류사오치, 린뱌오까지 찍어낸 것도 이 때문이다. 공산국가의 원조인 소련 역시 그랬다. 스탈린 1인 체제하의 소련은 부표처럼 떠돌아다니던 공산주의 이론가 레온 트로츠키가 눈에가시였다. 트로츠키는 서유럽 공산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으나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렸고 결국 제거 당했다. 멕시코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1940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의 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찍히는 변을 당했다.

 원조 공산국가의 독재자들을 흠모해온 김일성 역시 1인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반도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정적들과 한솥밥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일성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피의 숙청에 나섰다. 패전이 오히려 자신의 체제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정적들에게 패전 책임을 묻거나 반동으로 몰아 숙청을 단행했다. 이 당시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인물로는 조만식, 김두봉, 김원봉, 박헌영 등이다. 이 때 김일성이 이용한 정치세력이 갑산파다. 항일무장세력의 일파인 갑산파는 김일성과 정적 관계에 있던 다른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김일성 단일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1960년대 말에는 김일성의 후계구도문제로 분열음이 계속돼 숙청의 대상이 됐다.

 김일성의 정적 제거에서 가장 주목된 인물은 박헌영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김일성은 박헌영을 찍어냈다. 한 때 남한 공산당의 원조이자 북한 내에서도 상당항 영향력을 발휘했던 박헌영은 종파분자로 찍혀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2년뒤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장성택을 찍어낸 김정은의 북한은 자칫 위험한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이는 내부적인 불안 요인을 외부로 돌려 체제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섬나라 쥐새끼로 통하던 도요토미의 조일전쟁이나 나폴레옹의 광기, 김일성의 도발 등 근현대사의 예만해도 이를 잘 말해준다. 장성택 제거 이후의 북한에 대한 전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찍어냄으로써 후계권력을 다지고 군부와 노동당의 절대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갈 것이라는 쪽이다. 또 하나는 불안정한 김정은 체제의 권력 공백을 신군부가 비집고 들어와 김정은의 후견 세력인 장성택 제거를 주도했고 결국은 김정은까지 제거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재 북한 신군부의 중심에 있는 최룡해다. 한국전쟁 발발 시점인 1950년에 태어난 그는 김일성의 오른팔이던 빨치산 계열 갑산파 최현의 아들이다. 독재의 그늘에서 독재정권의 기초공사를 도맡아 해온 아버지 세대를 이어 그 또한 김정은의 권력체제 강화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허수아비격인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의 권력을 다져갈지, 아니면 2인자가 허용되지 않는 공산독재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김정은마저 제거할지는 미지수다. 문제는 불안하기 짝이없는 북한의 내부사정보다 직접적인 대치상황에 있는 우리의 분위기다. 한국전쟁 직전 우리 사회는 이념대결의 전시장이었다. 죄익과 우익은 틈만나면 돌팔매질을 했고 내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인 분위기였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극한대결과 갈등이 사회전반의 반목으로 이어진 결과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바로 그 불안한 1950년대의 한반도 상황이 오늘의 우리에게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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