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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 중에서


 수전 손택은 2004년 12월 28일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전, 아들 데이비드 리프에게 넌지시 자신의 일기의 존재를 알렸다. 손택은 평생 백여 권이 넘는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는 친구나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너무나 솔직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기록이었지만 리프는 '진실'과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손택의 뜻을 받들어 내밀한 이야기들을 회피하거나 윤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실었다. 손택의 인생 가운데 1947년부터 1963년까지 청춘의 한 토막을 떼어 내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사춘기 시절의 성적 자각과 결혼 생활에 대한 환멸, 보고 듣고 읽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담하고도 거침없는 비평들,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점철된 연애사로 가득하다.


 새로운 비평적 감수성의 시대를 연, 미국 지성계의 대모이자 전방위 문화평론가 수전 손택의 탄생에 얽힌 그 필연적 계기들과 성장통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하고 신중한 사유를 풀어 놓았던 손택이 전혀 다른 격정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손택은 집요하게, 기록벽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도서 목록과 공연 목록, 단어 목록을 만들었다.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 연극, 오페라, 음악과 회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비평과 감상을 남겼다. 사실상 손택은 단 한 가지 소망,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인생의 매 순간을 수렴시켜 나갔다.


 손택은 작가야말로 세상이 동성애자인 자신에게 겨누는 무기에 맞설 정체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각은 글쓰기를 추동했고, 채워지지 않는 성적 욕망은 끝없는 지적 요구로 변환됐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다>는 지적 편력과 사랑의 여정을 통해 수준 높은 문화 취향과 비평 감각을 갖춘 지성인으로 손택이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일기 속에는 이밖에도 손택에게 영향을 준 당대의 쟁쟁한 문화계 인사들이 등장한다. 대단한 야망가였던 손택은 버클리 대학에 들어간 1949년 겨울, 대담하게도 토마스 만을 찾아가 그와 문학을 논하는가 하면 동료 학자들과 작가들,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E. H. 카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손택이 하버드 대학교를 다닐 때 남편 필립 리프와 함께 친분을 쌓은 사이고, 종교 신학자 야콥 타우베스와는 강의를 같이 하면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손택은 책이나 공연을 반복해서 읽고 보며 지난 견해들을 수정했다. 지나간 일기들도 마찬가지로 다시 읽고 고쳐 썼다. 일기란 단순히 신변잡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창조하고 규정해 가는 과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일기 속에서 손택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났고 스스로를 창조했다. 그렇게 손택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글쓰기,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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