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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울산은 '울산 정명' 600년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수만 년 역사와 6,000년 전 반구대문화가 살아 있는 울산에 600년의 의미는 짧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명 600년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울산과 오늘의 울산, 그리고 미래의 울산을 하나로 연결해 새로운 울산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명 600년의 의미는 중요하다고 본다.
 울산은 올해 또다시 개인소득·1인당 지역내총생산·1인당 지역내총소득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울산이 이른바 '부자 도시'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제는 살기 좋고 풍요로운 도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로 거듭나야할 시점이다. 살기 좋고 머물고 싶은 도시는 수입이 많은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바로 문화다. 문화가 흐르고 문화적 소양이 갖춰진 사람들이 많은 도시는 생기가 넘친다. 울산은 비록 전국 소득 1위라는 성적표를 냈지만 부자 도시 이외에는 자랑거리가 별반 없는 '풍요 속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울산은 문화적으로 척박한 도시는 아니다. 현재 울산엔 5개의 구군이 있고, 각 지명에도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중 1018년 고려 현종 9년 탄생한 '울주'는 계산을 시작하면 1,000년의 역사를 가졌을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지명이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졌음에도 지금은 '울산광역시'라는 범주 속에 함께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명 변화를 단순한 행정적 변화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확대 팽창과정과 도시 발전상을 담아 이 시대를 입증할 역사기록물로 남기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600년의 미래를 그려나갈 성장동력으로 확보해야 한다.

소득 고속 성장에 따른 '영혼없는 부자도시' 인식
반구대 암각화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성 묻혀
울산문화권 발굴·재조명으로 미래 성장동력 마련

#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 처음으로 '울산' 지명 가져
울산은 근대 50년의 역사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신라 100년의 모항으로 국제교류의 통로가 됐던 곳이다. 울산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울주'는 이미 이름이 부여된 지 1,0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역이고 울산 역시 우시산국으로 시작한 역사성이 정명 600년을 맞은 역사와 전통의 뿌리를 가진 도시다. 무엇보다 울산은 한반도 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반구대암각화부터 신라 문화와 또 다른 차별성을 가진 울산문화권의 오래된 역사는 물론, 가히 역사 문화의 도시로서 그 위상이 바뀌는 추세다.

 울산의 역사는 오랜 연원을 가졌지만 실제로 울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은 1413년이다. 조선 태종 13년. 태종은 주·부·군·현 등 행정단위의 등급을 명확히 하는 지방제도를 개편하며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에 주자 대신 '산(山)'자나 '천(川)'을 쓰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도호부 이하였던 울산도 원래 이름 울주(蔚州)에서 울산(蔚山)으로 개칭된다. 이는 '살기 좋은 큰 고을'이라는 주(州)보다 한 단계 강등된 것이기는 하나 이 새로운 이름, '울산'은 이후 600년간 임진왜란이나 농민항쟁 등 굵직한 역사의 순간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뿐 아니라 근현대 산업시대로 오며 어느덧 나라를 견인하는 산업수도로서 그 궤적을 분명히 했다.

 울산 지명의 연원은 삼국사기 열전 거도조 등에 등장하는 '우시산국'(宇尸山國)이란 지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시산국의 시(尸)는 이두에서 'ㄹ'로 많이 표기되는데 우시산의 '우'와 '시'를 합치면 '울'이 된다. 울산은 울뫼나라, 즉 울산국이었던 것이다. 이 우시산국은 삼한시대에 존재했고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 유적이 그 실체로 추정된다. 이후 울산은 삼국시대 때 굴아화(屈阿火)현에서, 고려 때 흥려부(=흥례부)로 승격했다가 다시 공화(恭化)현으로 강등되는 등 다양한 이름을 거친다. 특히 고려 초 울산은 박윤웅이 후삼국 통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기존 하곡현, 우풍현, 동진현 등이 따로 존재하던 것에서 흥려부, 즉 고려를 흥하게 한 지역으로 합해지며 격상했다. 당시 고려 성종이 방문해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정도로 울산은 위상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이 시기는 현재 울산의 모습을 갖춘 때이기도 하다.

# 반세기 산업화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울산의 참모습
그런 역사를 가진 울산이 이제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도시가 됐다. 실제로 외지에서 울산을 보는 시각은 근로자가 외제 차를 몰고 골프연습장에 가고 20대는 아웃렛보다 백화점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울산이 그렇단다.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물론 일부만 보면 울산은 그렇다. 전국 어느 도시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고 부의 집중 현상이 심화하는 곳이 울산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도와 성장이 빚은 기괴한 조형물이다. 가치전도의 시대를 사는 오늘이지만 적어도 도시 평가마저 가치가 전도되는 일은 불행하다. 소득의 고속성장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이 아니라 가치전도의 심화가 초래됐다는 쪽이 옳은 판단이다.

 외제 차 몰고 백화점 쇼핑을 선호하는 것이 '울산스타일'이라면 적어도 시민 대부분이 이를 수긍해야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괴리감은 결국 통계 오류거나 부의 양극화라고 보는 것이 옳다. KTX를 타고 울산을 처음 찾는 이들은 일반화된 선입견으로 울산역에 도착한다. 그 첫 만남이 '근대화의 메카, 선진화의 리더'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희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퍼져나오는 휑한 공장과 굴뚝이 그들을 맞는다. 태화강 역이나 고속버스로 울산을 찾으면 사정이 달라질까 싶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상스러운 건물과 휘황찬란한 불빛이 시야를 가로막는 태화강 역 주변은 모텔 천국이다. 그게 울산의 관문이자 울산의 브랜드라도 되는 것처럼 저마다 온갖 홍보에 열을 올린다. 메카로 시작한 천박함이 러브호텔로 쉼표를 찍는 모양새다. 쉼표를 잠시 훔쳐보다 고개 돌리면 도심의 밤은 화려하다. 셀 수 없는 환락의 공간이 도심의 밤을 채우고 비틀거리는 욕망이 네온으로 번쩍거리는 도시가 울산이다. 오죽하면 유흥업소 종사자가 단기간 돈 벌기 가장 좋은 곳으로 지목할까 싶지만 그게 현실이다.

 울산의 오늘이 이렇다고 해서 울산의 전부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곤란하다. 미안하지만 울산은 공업센터 50년이나 조국 근대화의 일 번지가 전부는 아니다. 이미 6,000년에서 7,000년 전 이 땅에서는 해양문화와 북방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천 년 전에는 통일신라의 가장 중요한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뿐인가. 고려 이후 수군의 거점지역으로 해군항의 역할을 해온 것이 울산이고 600년 전 오늘 울산의 이름을 부여받고 경상좌도의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쪽의 요새가 됐던 곳이 울산이다. 그런 울산이 눈앞의 50년 역사로 평가되는 일은 불행하다. 50년 역사가 비록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산업수도를 이끈 영광의 시간이었다 해도 그것이 울산 전부는 아니다.

    반세기 전 울산에 모여든 시민 대부분이 새로운 울산의 주인이 된 튼튼한 내공을 가진 도시다. 반구대암각화로부터 현대자동차와 중공업에 이르는 수천 년 세월이 강을 따라 흐르는 도시가 울산이다. 문제는 부의 획득이 가져온 폐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울산은 너무나 천박한 도시다. 천박함이 지나쳐 시궁창 냄새가 밤마다 이 도시에 넘쳐흐른다. 수천 년의 역사성을 가졌고 울주 1,000년, 울산 600년의 지명사를 가진 도시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문화가 요란한 조명에 가려진 울산이지만 이제 그 암흑을 걷어 내야 할 때다. 지금까지 울산은 박정희 시대, 특정공업지구 지정 이후의 도시화 과정에서 고찰하려는 작업들이 울산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됐다. 이 때문에 수천 년의 역사성을 가진 울산의 참모습은 사라지고 산업수도의 이미지만 주목받았다. 하지만 울산은 6,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고 천 년 수도의 국제항과 국제교류의 현장이었다. 그 저력은 바로 다양한 문화의 교차지점이자 새로운 문화의 출발지로 나타나 오늘의 울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역사문화학계의 평가이기도 하다.

# 현대화 이전의 역사 더듬어 울산 정체성 재정립 출발점 삼아야
바로 그 지점에서 울산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 울산의 역사·문화는 현대화 이전의 울산, 즉 역사성을 더듬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작업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씩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울산 정명 600년의 의미는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울산의 역사성을 부각하고 시민의 공동체 의식을 묶는 새로운 전환점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라지고 없어진 지역의 역사문화자료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일부터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읍 단위의 작은 어촌에서 반세기 만에 소득 1위의 거대 광역시로 변모한 울산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혹은 생계를 위해, 혹은 대망을 안고 울산을 찾은 젊은이들은 1세대가 이미 할아버지가 됐고, 2세대도 어엿한 중년의 아버지로 자리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울산이 태어난 곳이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미래를 설계하는 자신의 뿌리가 됐다.

 도시의 성장과 발달은 산업의 성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흔히 도시국가로 세상에 명함을 내민 그리스 로마인들은 서남아시아의 정신적 문화유산과 기술을 전수받기 전까지 야만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야만적 기질을 가진 그들의 공동체는 짝짓기와 먹을거리 찾기에 급급해 종족을 늘이고 부는 축적했지만, 문화를 만나지 못했기에 무질서와 혼란이 판을 쳤다. 그들이 만난 도시는 웅장한 건축의 공공시설이었고 그곳에서는 더는 야만적 행위가 계속될 수 없었다.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공공질서였고 그 공공질서의 기반이 문화의 힘이었다. 도시의 성장이 문화적 힘과 연결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문화적 기반이 부족한 도시는 천박하다. 도시의 구성원들이 천박해서가 아니라 도시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이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기에 그렇다. 파리가 유명한 것은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수백 년 이어온 선조들의 문화가 혈관처럼 얽혀 도시의 틀을 잡고 그 정신이 혈맥처럼 흘러 센 강의 강심을 펄떡이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인종이 모여든 뉴욕이 세계의 도시가 된 이유는 객 것들이라는 천박한 배척이 아니라 다양성의 조화와 융합이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대체로 세계인이 모여드는 도시는 개방성과 다양성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곳이다. 그 가로 세로의 얽힘이 빚어내는 오만가지 문양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그 일원이 되기를 희망하게 한다.

 울산은 가능성의 도시다. 천 년 전 국제무역항이었던 울산이 눈앞의 50년 역사로 평가되는 일은 불행하다. 50년 역사가 비록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산업수도를 이끈 영광의 시간이었다 해도 그것이 울산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울산은 대부분의 시민이 토박이가 된 튼튼한 내공을 가진 도시다. 반구대암각화로부터 현대자동차와 중공업에 이르는 7,000년 세월이 강을 따라 흐르는 도시가 울산이다. 그 강에 어떤 문화의 꽃을 피울지를 놓고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진정한 세계도시 울산이 될 수 있다.   김진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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