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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 요즘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여유는 마음까지 느긋하게 만든다. 바쁠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에 가지지 못했던 생각들이 한 가지씩 기지개를 켠다.  

 어제는 거실 한쪽에 정물처럼 놓여있는 누런 호박에 눈이 갔다. 두어 달 전 시골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대로 두면 썩어서 버릴 것이 뻔했다. 어머님이 챙겨 주시면 뭐든 마다하는 법 없이 넙죽 잘 받아오지만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다. 상해서 버릴 때마다 챙겨 주신 마음이 밟혀 편치 않다.   

 요즘은 가정에서 호박죽을 끓이거나 빈대떡 같은 음식을 예전만큼 잘 만들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가는 것은 내남없이 피하려고 한다. 요리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시간과 공을 들여 별식을 만들지 않는다. 생활이 바쁘기도 하지만 애써 만들지 않아도 집 앞에만 나가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맛은 회귀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옛날에 어머니가 해 주시던 별미들이 하나, 둘 생각나면서 내 손으로 호박죽을 끓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껍고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 압력솥에 한소끔 끓여 놓았다. 물에 불린 찹쌀을 갈고. 팥도 삶아 함께 넣고 죽을 끓였다. 북덕북덕 죽이 끓기 시작했다. 죽이 된 호박에 팥알이 섞이니 먹음직스러웠다. 눋지 않도록 젓는데 죽이 퍽퍽 튄다. 손가락을 데였다. 잔손 많이 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데기까지 하는 이런 일을 새댁들은 하고 싶지 않겠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발휘한 솜씨였지만 맛이 그럴 듯 했다. 남편과 딸아이가 맛있게 먹었다. 혼자 계시는 앞집 할머니께도 한 그릇 갖다 드렸다. 딸은 사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 올렸다. 미안한 마음이 슬쩍 지나갔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을 귀찮게 여기는 바람에 놓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어디 한둘인가.

 내친 김에 뒷베란다에 부려놓은 무를 씻었다. 계획에도 없던 무김치를 두 통이나 담았다. 가을무는 달았다. 별 솜씨를 부리지 않아도 김치는 맛이 났다. 넉넉하게 담아 놓으니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일 하느라 늘 바쁘게 뛰어다니는 후배에게 한 통 보냈다.

 부드러운 무청은 널어 말렸다. 숨죽인 채 얌전히 말라가는 이파리들을 보며 다가올 겨울 식탁을 머리에 그렸다. 무청은 물기가 마르면서 시래기가 될  것이다. 마음이 훈훈해지고 입맛이 돌았다. 잘 마른 시래기를 약한 불에 뭉근해지도록 삶아 자작한 물에 된장을 풀어 지져 놓으면 뱃속을 뜨끈하게 데워주는 겨울 반찬으로 그저 그만이다.

 불량주부인 나는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모른다. 한 번씩 뒤져보면 별의별 게 다 나온다. 점점 커진 냉장고 속으로 죄 들어간 음식들 중에 뒤로 밀려난 것들은 빛도 보지 못하고 버려진다. 오늘은 냉동실을 정리하다가 녹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녹두를 보니 빈대떡이 먹고 싶다. 녹두를 물에 불려 수십 번을 치대며 껍질을 벗겨냈다. 묵은지를 다지고 돼지고기도 갈아왔다.

 재료를 한데 버무려 추억의 빈대떡을 부쳤다. 고소한 기름 냄새에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딸애는 자주 먹어본 음식이 아닌지라 썩 맛있어 하는 눈치는 아니다. 하긴 요즘 아이들 입맛에 맞을 리 없을게다. 나는 군불 지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그리움을 먹었다. 옛날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추억으로 먹는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어머니가 먹었고 내가 먹었던 음식들이 딸에게도 대물림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노파심일지 모른다. 기억을 되살려 예전에 먹었던 음식을 계속 만들어 볼 작정이다. 먹어봤던 음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기억을 할 것이다. 내가 이런 마음이듯 딸들도 옛맛을 되찾고 싶은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한때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패스트 푸드가 점점 싫어진다. 입맛을 자극하는 요란한 음식에 손이 선뜻 가지 않는 것은 혀끝만 희롱하는 가벼움 때문이다. 과정 없이 결과만 있는 봉지 속 과자에 현혹되고 싶지 않다. 몸피만 커지고 속은 제대로 여물지 못해 일어나는 요상한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던가. 

 생활은 전에 없이 편리해졌지만 늘 시간에 쫓기고, 예전보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것은 줄어들었다. 시간도 재단하기 나름이다. 이제는 한 걸음 늦춰 걸으며 시간과 공을 들이는 일에 마음을 쏟고 싶다. 뭉근하게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어난 생의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잘 채워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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