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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되고 참 많은 글을 써서 세상 속으로 날려 보냈다. 내 마음 속에 저장된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잊지 못할 것들은 모두 글이라는 옷을 입혀 떠나 보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이야기는 아직 글로 적지 못했다.  

 스물여덟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이었다. 장충동 태극당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대학로 밀다원에서 샘터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를 다리 꼬고 앉아 감상해 본들 나는 울산 촌놈이었다. 고헌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흙내 나는 물 한 잔이 시도 때도 없이 그리웠다. 

 반포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울산으로 가는 야간 우등고속 첫 차는 10시에 있었다. 봄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설레는 내가 버스에 오르면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이 꽃처럼 고왔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10시 버스가 새벽 3시가 돼야 울산에 도착한다는 사실이었다. 휴대폰도 없고, 지금처럼 자가용이 넘치는 때도 아니었고, 밤늦게 혼자 택시를 타는 것이 겁나는 세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내가 그 밤 10시 차를 고집했던 데는 믿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이었다. 대충 시간을 알려주고 다시 차에 오른다. 언양 휴게소를 지나면 곧 아슴아슴 졸고 있는 언양이 보였다. 깨어서 내릴 채비를 해야 할 때다.

 언양에서 울산으로 가는 초입에 임시 정류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내리면 시골집으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했다. 그런데 그 정류장에서 내리는 일은 내리는 사람 마음이 아니라 버스 기사 마음이었다. 그곳에서 승객을 내려주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한사코 안 된다는 기사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캔커피라도 챙겨서 일찌감치 애교라도 떨어놔야 할 판국이었다.

 1시가 되면 텔레비전을 켜놓고 주무시던 아버지와 엄마가 부스스 깨어난다. 아버지는 손전등과 내가 바꿔 신을 운동화를 들고, 엄마는 내가 입을 겉옷 하나를 더 챙긴다. 그리고 고헌산 숨소리로 가득한 산길을 걸어 걸어 정류장으로 마중 나오신다. 여름밤에도 그랬고 겨울밤에도 그랬다. 보름밤에도 그랬고 그믐밤에도 그랬다. 고약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마도 설 즈음이었나 보다. 내 입장에서 고약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버스 기사가 예의 그 임시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때 내가 택한 최선 방법은 울어버리기였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스를 세워야 했다.  

 코 앞에서 부모님을 놓쳐버렸다는 안타까움과 어쩌면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어둠이 주는 막막함이 애처럼 울어버리는 용기를 주었다. 더는 못 당하겠는지 100미터쯤 지나 스르르 버스가 섰다. 정류장을 향해 발바닥이 따갑도록 달렸다. 저 앞에서 달려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안 보아도 아버지였다. 서러울 것도 없으면서 아버지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을 닦고 터미널까지 또 한참을 걸어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 3시가 훌쩍 넘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 보면 빈 집에 나 혼자였고, 다 식은 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 때 어깨에 삽을 맨 아버지가 먼저 대문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밥 먹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시고는 다시 외양간으로 가셨다.

 딸자식 까칠해진 얼굴 한 번 쓰다듬지도,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도 물어주지 않았다. 일요일 정오쯤 서울로 가기 위해 언양 가는 마을버스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것이 내가 쓰고 싶은 아버지 이야기의 전부다. 오래된 풍경화같이 낡은 이 이야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참을 엎드리게 된 것은 20년이 흐른 지난 가을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8개월 전에 한 쪽 눈을 잃었다.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눈동자 자체가 물이 돼 녹아버렸다. 아버지가 그 고통을 말없이 이기는 동안 엄마한테서 몰랐던 아버지의 한쪽 눈 사연을 들었다. 아버지의 한쪽 눈은 젊었을 때 사고로 눈동자가 약간 일그러져 있다. 그것이 무섭고 보기 싫어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눈 맞추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는 것은 몰랐다. 특히 밤눈이 어두워서 밤에 거동하는 것을 자제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나를 마중가는 그 멀고 어두운 새벽 1시의 길 위에서는 언제나 엄마보다 몇 걸음 앞서 있더라는 이야기도 뒤에 들었다. 

 올 겨울 고향집 눈 소식은 아직도 쌓이지 못했다. 쌓이지 못한 눈은 땅 위에서 녹아 사라졌다. 그 시절 아버지의 고단하고 어두운 발걸음도 모두 땅 위에서 흩어졌지만 사랑이라는 발자국으로 내 가슴에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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