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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사랑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거친 후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을 부르는 이름일 것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상대에게 몰입되었던 사건인 것인데 물론 이런 사랑에 빠지지 않고 소개팅이나 선을 보면서 냉정하게 '현실'을 고려한 것으로서만 결혼에 이른 부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라는 것이 '화학작용' 없이 결합에 이르기는 힘든 것이라서 글쎄 어떤 감정적 격랑이 없이 그냥 결혼에 골인했다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과정은 어려운 개념이지만 변증법적 과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애인에게 자신을 내주는 것 애인에게 빠져서 자기 자신을 잊는 것 그로써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 있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잊음으로써 바로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된다는 것인데 모순적이지만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데 자신을 되찾게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려서 성인이 되기까지 '나'라는 것이 또렷해지는 시기였고 그러면서 '너'에 대한 관심도 커졌던 것이다. 그런데 나를 잊는다니.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원초적 유형은 마치 신화에 나오는 영웅 선녀와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 있는 남녀에게 투사된다는 것이며 투사되면 황홀한 신비적 융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에게서 선녀를 보고 있을 때일 것이다. 그렇게 신비적 융합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나도 잊고 일심동체의 그대만이 마음에 살아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였던 때가 있었다. 사랑의 초창기에 그런 융합이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인데 하지만 사랑하는 자의 운명은 죽음이라고 한다. 하나었는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현실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느껴지는 환멸은 거의 죽음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로맨티시즘은 바로 이 죽음과 같은 현실의 깨달음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그렇게도 사랑한 것은 상대방이 응하였던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서였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서 성숙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실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라는 것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상대에게 주어 졌던 것이고 그 투사에서 자기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로맨티시즘 같다.

 사랑은 사실은 저 바깥에서의 두 남녀의 일이기 보다는 내안의 마음의 과정으로서 남자인 나와 내 마음속의 여성인 아니마 사이의 과정인 것이 더 강하다. 그 사랑 감정인 아니마를 성숙시키지 못하면 결국 바깥의 남녀도 궁극적으로는 파탄을 맞을 사랑은 내적 과정인 셈이다.

 많은 부부들이 위기를 맞고 반목하며 이혼으로 끝을 맺는데 이런 이혼까지의 과정에는 물론 현실에서의 두 남녀가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마음속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두 남녀의 시각차, 가치관의 차이, 성격의 차이 등 이혼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덜 성숙한 내면이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면서 불화가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성숙시켜 자기실현을 해야 하는 남녀 각자도 파탄을 맞는 것이다.

 한 인간이 성숙해질 때 그는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식 무의식을 통틀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라도 자기의 내면으로 돌아와야 하는 부부는 결코 일심동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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