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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대곡천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두동면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 일대. 선사인의 숨결이 살아 있는 냉기 가득한 골짜기에 태고의 신비가 가득하다. 이창균기자 photo@ulsanpress.net

# 공룡발자국과 천전리각석
며칠째 내린 폭설로 바짝 긴장한 날, 문득 대곡천에 가고 싶었다.
 몇 십 년만의 폭설이 내린 지난 2011년 늦겨울, 우연히 찾았던 대곡천의 겨울 설경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 발목까지 찬 눈길을 헤치고 들어가 본 천전리각석 인근의 풍경은 현기증 나는 하얀 신기루였다. 구름아래 가파른 산허리를 감싼 하얀 눈, 그 사이로 살며시 내민 검은 속살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폭설에 신음하는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백색 신기루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20㎝가 넘는 적설량을 보인 도심지역과는 달리 울주군 범서, 언양 일대는 잔설조차 찾을 수 없었다.
 국도를 타고 두동면 천전리 대곡박물관을 지나 천전리각석쪽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잔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채 녹지 않은 잔설을 헤치고 들어가니 평범하지 않은 너럭바위가 반겨주었다. 바로 1억 년 전에 공룡들이 뛰어 놀았던 곳이다.


 천전리각석이 위치한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에는 전기 백악기 시대의 대형 초식동물인 울트라사우루스의 발자국을 비롯해 십여 종, 약 200여 개의 발자국이 발견된 곳이다. 마침 그동안 내린 눈이 녹았다가 발자국 속에서 다시 얼음으로 변해있었는데 그 덕에 육안으로도 쉽게 공룡 발자국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 건너편 천전리각석 주위는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관람 편의를 위해 나무데크를 설치하고 있는 모양이다. 

▲ 관람편의를 위한 데크 설치공사가 한창인 천전리각석.
 천전리각석엔 잔설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천전리각석의 상단부분은 반구대암각화 상단처럼 마치 처마처럼 튀어 나왔다. 특히 천전리각석은 바위면 자체가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수천 년 동안 풍우(風雨)를 견딜 수 있었다.


 공룡발자국과 천전리각석을 뒤로하고 데크길을 따라 반구대암각화 쪽으로 이동했다. 산허리에 오르니 대곡천이 굽이치고 있다. 치술령과 국수봉에서 흐르는 물은 북으로 흐르다가 삼정리에서 남으로 방향을 틀면서 백운산에서 흐르는 서하천과 고헌산에서 동으로 흐르는 구량천에 합류해 대곡천으로 흐른다. 대곡천의 옥류는 상류에는 백련구곡을 이루고, 현재의 암각화박물관 아래로는 반계구곡을 형성해 절승가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옛날부터 경향 각처의 시인묵객들은 이곳을 찾아 자연을 벗 삼아 경관을 예찬했다고 한다.

#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풍경 일품
잔설이 남은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대곡천 주위는 태고(太古)적 자연의 신비를 가지고 있다. 기암괴석과 잔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20분 남짓 걸어 이동하니 암각화박물관이다. 이곳부터가 겨울 반계구곡 중 구곡(九曲)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천을 따라 온갖 기암괴석이 손앞에 잡힐 듯하고 도무지 거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눈길을 위로 들어보면 30m가 넘는 절승(絶勝)의 포은대(圃隱臺·반구대의 일명)가 보인다. 전체 윤곽이 말 그대로 반구대(盤龜臺)이다. 옛 '언양읍지'(1919)에는 반구대를 '산 아래 흐르는 물 위 수백 보(步)가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그 이름을 반구대라 했다'라고 적어 그 의미를 알게 한다.


▲ 반구대의 기암괴석.
 반구대 거북 머리 아래로 작은 언덕에 외로이 보이는 비각(碑閣)이 있다. 비각 안에는 '포은대영모비(圃隱臺永慕碑)'와 '포은대실록비(圃隱臺實錄碑)', 그리고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가 나란히 직립(直立)해 서 있다. 조선 숙종 38년(1712:壬辰) 이곳 유림들이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 삼현(三賢)의 유지(遺志)를 받들고자 반고서원(盤皐書院)을 세워 제향(祭享)했다가 고종 때(1841)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이 시행되는 바람에 훼철(毁撤)된 뒤 60년이 지나(1901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운 것이라 한다. 유허비각은 원래 반구대 아래 소구(小口)에 있었던 것으로 그 자리가 사연댐 건설로 수몰(水沒)돼 지금의 저 언덕으로 단(段)을 옮겼다.
 숲이 우거지지 않은 겨울이라 건너편의 서석(書石)과 바위그림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옛 선비들의 이름과 관직명(官職名)이 즐비하다. 그 중에도 '盤龜(반구)'와 '玉泉仙洞(옥천선동)', '圃隱臺(포은대)' 등의 글자가 선명하며, 2마리의 학그림도 찾아볼 수 있다.


 천사 송찬규(泉史 宋璨奎) 선생의 '포은대영모사(圃隱臺永慕辭)'라는 석문(石文) 싯구를 남겼다. 
 <높은 반구대 깎은 듯 서 있어 /한 줄기 기상이 하늘에 뒤섞이네 /백장이나 솟아오른 굳센 저 바위들 /천년토록 흐르는 맑은 저 시냇물 /이 산 저 내에 일월은 끝이 없고 /송백도 절개 지켜 구름 속에 푸르니 /포은 선생 충절이 이곳에 깃들었나 /굽이도는 시냇가를 나 홀로 거니네>
 때마침 깎은 듯 서 있는 반구대 위로 하얀 눈이 내렸다. 폴폴 휘날리는 눈발에 희미해진 반구대가 신기루처럼 보였다.

# 반구대암각화까지 다양한 유적지 볼거리
유허비각을 건너다보는 자리에 포은 선생의 가르침을 후학(後學)에 전하고자 지방 유림들이 세운 '반구서원(盤龜書院)'이 자리했다. 반구대를 관망할 수 있는 곳에 고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집청정(集淸亭)'이다. 조선 영조 때의 증병조판서 최진립(崔震立)의 증손인 최신기(崔信基)가 문중의 정자를 이곳에 짓고 '집청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계 석학들이 바위그림의 으뜸으로 꼽는 '반구대암각화'에 이르렀다. 반구대암각화는 지금 가변형투명물막이댐 공사를 위한 기초조사를 하기 위해 파 놓은 생채기로 신음하고 있었다. 곳곳에 하얀 눈이 쌓였지만 생채기를 다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하루빨리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왔으면 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되돌아 나와 두서에서 두동으로 가는 길, 대곡댐 수몰 주민들을 위한 '망향비'에서 멈췄다. 오랜 겨울 가뭄 탓에 옛 마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옛 도로의 흔적이 선명하다. 아마도 백련정(白蓮亭)까지 이어진 도로일 것이다.


▲ 잔설 속에 묻힌 암각화박물관.
 백련정은 '연꽃처럼 희고 아름다운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때는 백련서사(白蓮書舍)라 불리며 서원으로서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는데 대원군 때 서원철폐 정책으로 서원은 폐쇄됐고 정자는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백련구곡 중 오곡(五曲)으로 추정되는 백련정 앞도 반구대나 천전리각석 인근만큼이나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백련정과 그 앞에 펼쳐진 눈 덮인 대곡천의 절경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도로는 흔적만 있을 뿐 더는 갈 수 없는 곳이 돼버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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