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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석탑을 가졌던 미륵불의 도량
[일상탈출]전북 익산 미륵사지
2014년 03월 13일 (목) 21:02:29 강정원 mikang@ulsanpress.net

   
▲ 미륵사 절터에 남겨진 흔적들을 근거로 제작된 미륵사 모형. 중앙의 거대한 목탑과 양쪽의 석탑, 각 탑의 뒷쪽에 위치한 불당과 회랑 등의 모습에서 백제의 융성한 불교문화와 건축미를 느끼게 한다.
#경주 황룡사와 버금가는 규모
울산에서 익산으로 가는 길이 수월치 않다.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와 전주를 거치던지, 남쪽 진주와 전주를 거치는 4시간이 넘는 고행 길을 가야한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랴. 이달 30일이면 '장엄사리'는 다시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가고, 미륵사지 9층석탑이 복원되면 원래 있던 곳으로 가 세상 밖으로 영원히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힘겹게 찾은 익산 미륵사지의 첫 느낌은 '참 넓다'라는 것이었다. 전라북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새만금간척지와 인접한 익산의 지형은 평탄하다. 태백준령들 때문에 산지가 많은 동해안 지역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미륵사지를 품은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해발 430m)은 너른 들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선 산이다. 하지만 미륵사지에서 바라본 미륵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백제부흥을 꿈꾸던 무왕이 왜 이곳에 미륵사를 세웠는지 알 것 같다.


 미륵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들 경주 황룡사 이야기를 많이 한다. 황룡사는 미륵사 보다 앞선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월성 동북쪽에 창건됐다. 특히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慈藏)의 권유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해 세운 황룡사의 9층 목탑은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이다. 아마도 백제는 신라의 황룡사를 염두에 두고 미륵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륵사지는 황룡사 터와 비교해 결코 좁지 않다. 황룡사의 목탑 대신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었던 화강암을 이용해 탑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특별전
미륵사지에 들어서면 '유물전시관'이 회백색의 단아한 모습으로 서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이란 현수막이 걸렸다. 이 특별전은 지난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사리장엄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유물은 9,600여점. 모두 진품 유물로 국보급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특히 전시된 금동제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등의 유물은 1,400년 전 백제인의 세련된 금속가공 기술과 백제의 미를 엿볼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사리였다. 전시관 한쪽 유리벽 안에 12과의 자수정 한가운데 작은 결정이 바로 석탑에 안치됐던 사리다. 2009년, 해체 중이던 석탑의 기단부에서 '사리장엄 일체'가 발견됐다. 조심스레 돌을 들추자 탑 조성의 내력이 새겨진 금판과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금제 사리 항아리가 나왔다.
 금제 항아리 안에 다시 작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었고, 그 안에 깨진 유리병과 사리 13과를 비롯해 9,9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성분분석 결과 사리 13과 중 밥톨만한 하나만 진짜 사리고, 나머지는 석영이었다고 한다. 500년 백제 부흥의 꿈을 사리 한과에 심은 것이다.


   
▲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사리항아리.
 하지만 역사는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미륵사를 창건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미륵불'이라는 불심을 빌어 왕조의 부흥을 꿈꿨던 무왕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 꿈은 거대한 석탑 속에서 1,700년을 버텼다. '장엄사리'는 복원 프로그램에 따라 다시 탑 속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길고 긴 세월을 보낼 것이다. 마치 찰나의 시간처럼 한 순간 만난 한과의 사리가 주는 감흥은 오랫동안 잊혀지 않을 것 같다.

#무왕시대에 건립된 3탑3금당
전시관 유물을 만난 뒤 절터로 나서자 지난 1997년 해체하기 시작한 석탑에서 나온 수많은 석재들이 저마다 명패를 찬 채 누워있다. 해체를 시작한지 벌써 17년, 미륵사지 석탑은 이제야 해체를 끝내고 복원만을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의 창건 내력을 들춰 보면 이렇다.
 "무왕이 어느 날 부인과 함께 미륵산의 절집 사자사에 향을 올리러 가다가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상을 발견한다. 가마를 멈추고 예를 올린 무왕은 '이곳에다 큰 절을 세우기 원한다.'는 아내의 청을 허락한다.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에게 절 짓기를 청하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깎아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 땅에다 불전과 탑, 회랑을 각각 3곳에 세웠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사람을 보내 절 짓기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창건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이러한 전설에 따라 무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미륵사는 길이 172m, 너비 148m로 3탑3금당식의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중앙의 거대한 목탑 좌우로 두 기의 석탑이 있었고, 탑들 뒤로 하나씩의 금당(불당)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건물과 탑 주위는 세 개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미륵사는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는 제법 번성했으며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 시대에 이르러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복원공사 완료될 듯
사적 150호로 지정된 미륵사지는 면적 1,338만4,699㎡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로 석탑과 당간지주가 오랜 풍상을 겪은 채 남아 있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대의 옛 석탑으로 높이 14.24m에 이른다. 동서로 놓인 상탑 중에 서탑은 원래 9층으로 추정되지만 6층까지만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크게 파손되어 동면의 북쪽과 북면의 동쪽 일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이 탑은 볼 수 없다. 복원을 위해 완전 해체됐고, 2016년에야 복원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 보수 이후 약 100여 년 만에 새 모습으로의 탄생을 예고했다.


   
▲ 가운데가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추정, 나머지는 석영이다.
 서탑 옆의 동탑은 높이 27.67m, 기단 12.4m의 구층 석탑으로 1993년에 복원했다. 석재를 기계를 이용해서 깎았기 때문에 탑의 형태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현대기술로 조악하게 만든 모조품이라는 인상이 짙다.
 보물 236호인 당간지주는 우아한 형태가 돋보이며 높이 4.53m에 이른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두 개의 당간지주가 약 100m의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금산사 당간지주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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