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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내가 통장을 한지도 어느덧 6개월이 넘었다.  동사무소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통을 배달하기 위해서 이집 저집 열심히 전해 주고 사인을 받아야 했는데, 그 중의 한 집은 한 번씩 쓰레기봉투와 음식물 스티커를 함께 전해 주는 집이었다.

 그 집 할머니의 얼굴이 많이 부은 것 같아서 "얼굴이 이상하네요" 했더니 다름이 아니고 버스를 타고 오다가  급브레이크를 잡는 바람에, 미끄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했다고 하셨다. 치료비랑 위로금은 받으셨는지를 여쭈어 보았더니, 운전기사가 사는 게 시원찮아서 얼마 받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래요. 사정이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겠네요. 몸조리 잘 하세요"하고 나왔지만, 어렵게 사시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런 일까지 당하신 것을 보니 아픈 마음에,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마저 무게를 더 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은 다른 골목에서 배달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께서 박스를 주어 오시기에, 통장이라고 하면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드렸더니 너무 살기가 힘들다며 하소연을 하신다. "자식은 없나요?" 했더니 "아들이 있는데 일용직이라 일이 있을 때는 가고 없으면 놀고 해서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셨다. 노인 일자리라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지금 사는 곳은 달세 십 만원을 주고 산다고 하셨다.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조건이 맞아야 혜택이 주어지니  동사무소 가서 얘기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또 다음 날 다른 골목에서 다리를 약간 절면서 한 분이 걸어오시기에 통장이라고 하면서 "음식물 쓰레기통이 새로 나와서 배달중인데 잘 만났네요" 했더니 오히려 그 분이 나를 잘 만났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다른 동네에서 살 때는 6급 장애를 가져도 쌀을 갖다 주고 했는데,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부터는 그런 게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지금 사는 집은 전세 조금 걸고 월세 내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셨다.

 "동사무소에 사회복지사가 있으니 연락해서 신경 쓸 수 있도록 할 게요"하고 나왔다.
 아직도 우리 이웃에는 어렵게 사시는 분이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머물지 않도록, 혜택이 정당하게 돌아갈 수 있게 연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한 집에 벨을 누르니 대문이 열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수고가 많다면서 커피를 한 잔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지만, 그 한 잔의 커피가 밀려오는 피로를 가시게 하는 것 같았다. 마루 위에 까만 비닐 속에는 초등학생용 스케치북과 수업시간에 만든 물건들이, 마치 인사라도 하는 듯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 것입니까?"했더니 "이거요. 우리 손녀 것입니다"하시면서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시면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나가셨다.

 그 손녀가 13살이라고 하시면서 얘기하려면 길다고 하셨다. 짧은 시간 속에 13년의 희생과 아픔을 풀어낼 수 있었겠느냐마는, 며느리가 이 집을 자기 앞으로 안 해주면 안산다고 아들을 볶아 대고,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려 하고 방구석마다 소주병이 가득하고 해서, 아들이 어머니 도저히 이 여자와는 살 수가 없다고 해서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며느리가 일 년을 이 손녀를 데리고 강원도로 다니면서, 제대로 먹이지 않아서 우리 집에 데리고 올 때는 다 죽어가는 것을, 내가 온갖 정성으로 키웠더니, 하루하루 다르게 성장해서 이제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남이 부끄러워서 2-3년은 대문 밖에도 안 나갔다고 하셨다. 

 "그것이 할머니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 까지 생각하실 필요가 없지요"했다.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손녀가 예쁘게 성장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라고 했다. 이 땅에 할머니께서 손녀 키우면서 마음고생을 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랑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셨지만, 결혼을 했으면 서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도 지혜롭게 참고, 가정을 부수는 것이 아니고 가정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한 쌍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통장이 하는 일은 단지 음식물쓰레기통 배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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