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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의료서비스 문제를 놓고 정부와 의료계의 이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양측이 벌이는 치열한 논리 공방에서 한발짝 떨어져 의료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최근 국내 번역된 <신의 호텔>이다. 이 책은 미국의 마지막 빈민구호소로 알려진 샌프란시스코 지역 공공병원 '라구나 혼다' 병원을 말한다. 캘리포니아대 의대 임상부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저자가 이 병원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쓴 회고록이다.
 

 저자는 파트타임 의사 자리를 찾다가 라구나 혼다 병원에 선이 닿는다. 이 병원은 노숙자, 극빈자 등 사회 소외계층을 비롯해 알코올 중독자, 치매를 앓는 노인 등 만성질환자가 삶의 마지막 희망을 붙들고 몰려드는 곳이다. 칙칙한 환경에 가난한 환자들이 잔뜩 모여 있으리라고 예상한 저자는 두 달만 일하겠다며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 의료가 펼쳐지는 현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애초 두 달로 정한 시한은 무려 20년으로 늘어났다.
 

 병동에는 머리맡에 큰 창문이 있는 환자 침상 30여 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한쪽에서는 수간호사가 24시간 이들을 관찰하고 돌봤다. 주요 기기라고는 엑스레이 촬영기밖에 없지만 의사들은 매일같이 환자의 침상을 찾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었지만 깊은 교감 덕분에 진단은 더 정확했고 처방의 확률도 높아졌다. 약물 오남용이나 불필요한 시술, 검사가 대폭 줄었다. 이렇게 절약된 시간과 비용은 다시 환자를 위해 투자됐다.
 

 선순환이 계속됐다. 경제학자에게는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인간 중심적 면에서는 오히려 효율적 상황인 셈이었다. 환자들은 또 직접 온실, 과수원, 동물농장을 돌보며 심리적 여유를 찾았다. 교회예배당에서는 환자들의 결혼식이 열렸고 넓은 홀에선 환자들이 웃고 담소하면서 포커를 쳤다. 병원이라기보단 서로 관심을 두고 돌보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였다. 과학적 의료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저자는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환자에게 큰 힘을 주는지 깨닫는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에도 자본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정책입안자, 경제학자, 의료컨설팅회사 등 '전문집단'이 생산성의 관점에서 병원을 대대적으로 바꿨다. '병원의 비효율성'은 과학적 경영, 첨단시설 등 21세기 보건의료 기준에 맞게 변신한다. 환자들이 유대감을 형성하던 개방형병동은 사생활보호를 이유로 폐쇄형으로 거듭났다. 동물은 비위생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처분됐다. 과학적 경영관리체계가 가동되자 수간호사와 의사의 수는 줄어들었다. 남은 의료진은 상급자에게 보고할 문서작성 등 행정 업무에 더 매달리게 됐다. 이런 변화를 거치면서 의료진은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환자들은 더 자주 사고에 노출됐으며 치유는 더뎌졌다. 결국 비용과 효율의 추구는 병원의 근간마저 무너뜨리게 됐다.
 

 저자는 이에 맞서 '느린 의학'을 지키려는 의료진의 분투를 생생하게 담았다. 소설처럼 흡입력 있는 문체로 다양한 일화와 근대 이전 의학 역사까지 두루 소개했다. 그는 불필요한 약물과 치료에 투자한 비용과 시간을 줄여 환자에게 좋은 음식과 환경을 제공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환자의 몸과 병동을 생태계 차원에서도 고려하는 '생태의료병동'의 개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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