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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화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인 주심포식으로 건립됐다. 외관이 수려한 배흘림 기둥으로 건립된 누각은 태화루가 유일하다. 사진은 북측 경내에서 바라본 태화루 전경. 좌로부터 대문채, 누각, 행각이다. 이창균기자 photo@ulsanpress.net

# 3일부터 일부 개방
'우여곡절'이 어울리겠다. 예식장 부지가 헐린 태화루부지엔 애초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2000년대 중반 건설경기 붐에 편승한 건설업자들이 이 부지를 그냥 놔둘리 없었다. 하지만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그들의 욕망을 막아섰다. 그 자리에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면 끝이라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뒤늦게 행정기관도 나섰다. 건축허가를 반려하고 땅을 사들였다. 민간기업이 건축비를 기부했다. 수월하게 진행되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부실시공 된 숭례문의 불똥이 튀었다. 갈라진 기둥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준공을 앞둔 시점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태화루는 화려한 귀환식조차 할 수 없게 됐다.


 태화로터리를 지나 태화교에 오르면 이제 온전한 태화루를 볼 수 있다. 녹음에 잠긴 태화루는 흡사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잘 어울린다.
 태화루는 진주 촉성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3루'라 불렸을 만큼, 옛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태화루의 존재는 삼국유사에서부터 확인된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643년 중국에 다녀온 후 태화강 변에 태화사를 세웠다. 자장은 당나라 오대산 태화지 연못을 지나다 그곳의 신인인 용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장은 당시 아곡현(울산)에 절을 지어 용의 복을 빌었다. 그 절이 태화사고, 절에 딸려있던 누각이 바로 태화루였다. 이후 태화루에 대한 기록은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다가 임진왜란 후(1590년대 멸실 추정) 흔적이 사라진다.

▲ 태화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홍보관.
# 역사 한눈에 전시된 홍보관
태화루 홍보관에 들어서면 이 같은 태화루의 역사가 잘 정리돼 있다. 입구에는 고려 명종(1170~1196) 때 태화루를 방문해 남긴 김극기의 시가 걸렸다.
 '이 절의…누각에 오르면 마치 그림 병풍에 기대어 아래로 한 장 얼음 삿자리를 굽어보는 것 같다' (김극기, 태화루시서)
 홍보관에는 태화루 건립초기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기와조각 등도 전시돼 있다.
 당시 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2곳과 조선시대 수혈유구(구덩이 유적), 통일신라∼조선시대에 걸친 기와조각 등이 확인됐다. 이 시굴조사에서 확인한 건물터와 유물이 문헌에 나타난 태화루의 창건 및 개축(조선초) 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추정에 머물렀던 태화루 터 임이 확실시 되는 단서가 된 유물인 셈이다.

▲ 태화루를 지탱하고 있는 배흘림 기둥과 주심포 양식의 부재들.
#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
홍보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문채고, 대문채를 따라 오르면 누각이다. 태화루는 정면 7칸, 측면 4칸에 외관이 웅장하고 내부가 아름다운 주심포식 건축물이다.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 짜임새(공포)를 만드는데 이 짜임새를 기둥 위에만 만든 건축 양식을 주심포라고 한다.
 고려 시대의 건축물은 대개 규모가 작고 단아해 주심포 양식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은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인 수덕사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이 있다. 태화루는 영남루와 촉성루와는 달리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으로 설계됐다. 처마 끝에서 보면 기둥 위에만 화려한 공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태화루는 현재 유일한 주심포 양식의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은 대개 배흘림 기둥이다. 태화루의 기둥도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기둥이다. 갈라짐이 많아 우려를 낳았던 태화루의 기둥은 보강작업을 거친 후 단청작업을 마무리해 매끄러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다 기둥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방수, 방염 작업을 마쳤다.

# 오랜 보존 바라는 마음 담은 마룻대 묵서
태화루의 천정에는 '용(龍) 서기 2013년 5월 30일 중창 상량 구(龜)'란 묵서가 선명한 마룻대가 보인다. 소헌 정도준 서예가가 쓴 이 묵서의 '용'은 태화루를 화재나 재해로부터 지키자는 의미이고 태화강의 과거 지명인 용금소를 뜻한다. 거북 '구'는 태화루를 오래도록 보존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마룻대에는 울산의 과거에서 현재, 미래상을 담은 상량문이 보관돼 있다.
 마룻대 아래 대들보에는 가운데 황룡을 중심으로 네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황룡은 용금소를 지키는 황룡을 상징하고, 동쪽은 청룡, 남쪽은 주룡(붉은룡), 서쪽은 백룡, 북쪽엔 흑룡을 그려놓았다. 울산의 상징인 백학의 모습도 보인다.

▲ 4신도(四神圖)를 차용해 대들보에 그린 용 그림.
#황룡 전설 깃든 용금소
태화루 아래엔 황룡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용금소가 있다. 울산 최초의 읍지인 권상일이 기록한 학성지에 실린 기록이다.
 '그 옛날 어느 고관이 태화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은잔으로 술잔을 돌리다 그만 용금소에 빠뜨렸다. 곧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불러 은잔을 찾아오게 했더니 은잔을 찾아 온 그가 하는 말이 "용금소 안에 바위 구멍이 있어 그 입구로 들어가 북쪽으로 1리쯤 가니 큰 궁전이 있었는데 그곳 왕이 말하기를 내가 살고 있는 위쪽 세상 사람들이 항상 시끄럽게 구는 것이 싫어 오늘 술잔을 빼앗아 이를 경고함이니 돌아가서 꼭 이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하며, 또 그가 말하기를 "굴의 깊은 곳에 가면 백양사 북쪽까지 갈 수 있는데 길 북쪽에 있는 박연지(박못)까지 통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 울산 8경 중 4경 다시 품다
태화루 배흘림 기둥에 서면 멀리 은월봉을 비롯한 남산 12봉과 오산대숲, 태화강대공원, 십리대밭교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태화루의 귀환으로 '동국여지승람'이 전하는 울산 8경중 4경이 온전해 진 것이다.

▲ 누각에서 바라본 산책로와 태화교 전경.
 자연을 찬미하고 시를 읊은 옛 선인들의 마음을 읽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태화루 전면에는 성남동 방면에서 태화강을 찾는 시민들이 태화강대공원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약 120m 가량 만들어졌다.
 태화루는 오는 14일 준공식을 가진다. 울산시는 주말인 3일부터 일부를 개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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