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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사회가 반면교사를 외치고 있다. 반면교사는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비슷한 뜻을 가지나, 그보다 의미가 더욱 직설적이다.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毛澤東)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단어는 대형사건이나 사고가 터질 때마다 되풀이 되고 있는 용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은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반면교사를 외쳤다. 마오가 반면교사를 이야기할 당시에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혁명에 위협은 되지만 교훈이 되는 경우를 지칭했던 말이지만 이제 이 말은 잘못된 것을 보고 가르침을 얻는 것을 말하는 일반화된 사자성어가 됐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반면교사를 이야기할 일은 무수히 많았다. 최근의 일만 해도 제법 두툼한 파일이 될 사건들이지만 언제나 정부는 반면교사로 삼자고 이야기 했고 그 때마다 대책과 대안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하기야 대책이 없고 대안이 없어서 되풀이되는 잘못은 대체로 없는 법이다. 문제는 이를 실행하는 사람에게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적폐라고 명명했다. 적폐청산. 이 묵직한 네 글자가 우리 사회의 의제가 됐다. 적폐(積弊). 이 단어는 생소하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단어를 만난 우리 사회가 청산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인 적폐를 털어내자는 청산이 힘을 받는 사회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반면교사를 외친 이들이 '양치기 소년'이 되버린 지금, 적폐청산이라는 낯선 용어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군사정부 시절의 선전구호 만큼이나 공직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적폐로 퇴적작용을 반복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흥분하는 이유는 어린 목숨이 참담하게 사라져간 일이 우선이지만 후폭풍은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적폐의  민낯이다. 적폐는 산업화와 근대화, 잘살아보자는 외침의 그림자다. 돈 많고 권력이 있으면 뭐든지 해결된다는 인식은 우리사회의 도덕불감증을 키웠다. 도덕을 교과서에서 지우고 바른생활이라 이름 짓고도 스스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던 기성세대는 이제 자라나는 2세들에게 더 이상 도덕을 공부하라 주장하지 않는다. 맞지 않는 이론을 이야기 할 명분도 없고 현실은 더더욱 괴리감이 생길 뿐이다. 그러니 적폐는 자연스럽게 과다한 퇴적물이 질감 있게  쌓여 바람과 햇살이 없어도 더욱 견고하게 고체화 되어 왔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치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틈만나면 고개를 치켜들고 목소리를 키웠던 정치가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뜬금없는 만용과 객기로 무장한 일부 인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정치는 세월호 참사에서는 한발 물러난 모습이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사의 근원이 정치였다. 우리 사회를 짓누른 적폐의 근원이 정계와 관계이기에 이를 알아차린 정치가 스스로 이불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도덕을 뒷주머니에 감추게 한 정치는 스스로 원칙과 상식이 결여된 사회에서 맘껏 숨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만 정치인과 관료가 언제나 갑이고 국민은 을일 수 있기에 가능한 적폐의 절대량이 줄어들지 않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전략쯤으로 여겨왔던 것이 우리 정치인들의 실상이다.

 반면교사를 아무리 외쳐도 먹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정치가 외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성수대교가 갈라졌을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 서해페리호가 뒤집힌 그날도 정치는 반면교사를 외쳤다. 그 외침이 무너진 원칙과 상식의 보편성을 다시 일으켜 견고한 적폐의 퇴적암을 부수는 작업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이만큼 참담하지 않을지 모른다. 온 국민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과거의 적폐에 냉소를 보내면서도 쉽게 내일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가 당당하게 앞장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월호를 반면교사로 삼고 침체된 내수를 살리고 수출전선의 정상화를 위해 온 국민이 매진하자고 외치는 정치는 실종됐다. 목젖까지 이 말이 차오르는 이들도 노란깃발 펄럭이는 팽목항이나 일상을 포기한 실종자 가족의 눈빛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문다. 망각 때문이다. 일이 터지면 온갖 폼을 잡고 반면교사를 외쳤던 스스로의 모습을 잊고 있었지만 아뿔사, 이번에는 무시로 다시보기가 이어진다. 수도 없이 되풀이해온 과거의 발언과 '재발방지'를 외치던 모습들이 신문에도 방송에도,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도 실시간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도 망각이 특효약이라 생각하는 부류가 정치인들이라는 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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