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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울산의 사무소로 부임한지 100여일. 때맞추어 시내중고등학교에서 전문직업인으로서 꿈과 희망의 특강 요청이 접수되었다. 나이 어린 학생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중, 60살에 맘을 내어 20년후 새집의 꿈을 이루고  병상에 계신 아버지 말씀이 스쳐간다.
 아버지는 한평생 흙을 만지며 지낸 농사꾼이다. 그는 동네 사랑방의 야학을 다녔던 분이기도 하다. 어린 마음에 늘 농사일 옷차림으로 바쁜 아버지에 비해, 학부모 회의나 행사 때마다 머릿기름을 바르고 양복차림으로 나타나는 다른 집 아버지가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입한 계모임에서는 해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아버지가 계장이던 해의 졸업식장에서 아버지가 장학금을 수여 할 차례였다.뒷줄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는 먼저 단상에 올라 표창장을 수여하던 분에게 당신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을 손짓으로 부탁하는게 아닌가. 어린 나에게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이 더해진 탓인지 군대를 마칠 무렵까지 아버지의 말씀은 나의 한 쪽 귀에서 다른 쪽 귀를 통해 곧 바로 새어 나갔다.
 정작 아버지의 말씀은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제대로 알아들었다.
 한번은 마굿간을 수리하는 동안 기른던 소를 이웃집의 축사에 공간이 있어 잠깐 옮겨 놓기로 했다. 건축현장의 일꾼과 장정 서너명이 소 다섯 마리를 몰았는데, 갇혀 있던 소가 마굿간을 나서자마자 온 동네로 달아나 이웃마을까지 소동을 부려 겨우 붙들었다.


 새 축사가 완공되면서 소를 다시 찾아 와야 했다. 이번에는  아버님이 직접 나섰고, 큰 소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귓속말로 집으로 가자고 달래며 등과 머리를 쓸어 주었다. 이윽고 작은 트럭만한 어미소가 지난번과는 달리 터벅터벅 허리 꼬부라진 주인을 따라 점잖게 나서는게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농작물을 자식같이 지극정성으로 거둬들여서 논밭의 작물들은 몸짓으로 주인의 말씀을 알아듣는 듯했다. 이런 농작물에 대한 아버님의 애정은  중국 유학시절 아버지를 백두산으로 관광차 안내할 때 읽을 수 있었다. 20여시간 북방의 기차여행길에 한국의 농부는 차창 밖의 많지 않은 깨밭을 헤아리며 의아해 했다. 당시 국내에 물밀 듯 들어온 중국산 참깨는 달리는 차의 반대 방향인 그 남방지역이 주산지였던 것이다.


 한번은 뉴질랜드로 건너간 손자손녀에게 할아버지는 첫 물음이 "그 사람들도 쌀로 밥을 해 먹더나" 하여 아이들을 깔깔 웃겼다.
 아버지는 또 돈관리에 대한 말씀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2남3녀의 자녀들에게 딸린 손주들까지 모이면 집이 좁아 서로 옷자락이 부딪혔다. 지난 추석 때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놓고 목표한 돈을 다 모았으니 새집을 짖겠다고 공표를 하셨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어떻게 큰돈을 모았느냐고 여쭈었더니 어머니가 서랍장에서 우체국과 농협의 스무개 통장을 꺼내오셨다. 작은돈이 모이면 큰돈 통장으로 갈아타는데, 통장마다 금액과 적금만기의 이름표가 붙었고, 50만원에서 기천만원짜리도 있었다.
 "버는 자랑 말고 모으는 자랑해라"
 혹 자식들이 돈을 헤프게 쓸까봐 주의를 환기시키던 분.
 아버지는 마을행사에 남 먼저 찬조금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마을입구 느타나무 아래 쉼터에는 아버지가 레미콘을 제공하여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의 손바닥 도장을 기념으로 찍어놓았다.


 그전에 아버지의 말씀이 제대로 들려오는 계기가 있었다.
 농사꾼 아버지는 동네에서 고대 중국의 설화에 나오는 신농씨로 불리었다. 또한 인심을 잃지 않아 어릴 때 동네어른들로부터 "원동어른이면 세상에 법 없어도 되제" 하는 말들을 듣곤 했다.
 이런 아버지에게 농민의 날을 맞아 장관 표창 제의가 있었다. 아버지는 수상을  강력히 거절했다. 마을에서 농사를 혼자 지어 온 것도 아니고 한평생 큰 탈 없이 잘 지내왔는데, 상으로 인해 이웃간의 서운한 금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말씀은 내 가슴을 온통 소용돌이로 휘저어 놓았다. 어린시절 일만 아는 원망스럽고 무서웠던 아버님 말씀이 귀에서 가슴까지  전해오는는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러한 아버지가 이제 말씀이 없으시다.
 오토바이 사고로 뇌수술을 몇차례 받으시고 누워계신지 반년이 지났다.
 노인이 먼길 떠나심은 마을의 도서관이 없어지는 것이라 했던가.
 농사꾼으로서 흙과 하늘을 통해 세상이치를 터득하신 아버님의 도서관에서, 대학원과 유학까지 다녀온 50대중반 아들은 일터와 주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해결을 위해 부족한 지혜와 지식을 빌려온다. 머리맡의 올해 카네이션은 휴관중인 아버지 도서관의 빠른 개관을 위한 열쇠가 되기를  병원에서 돌아오는 출근길에 빌고 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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