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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하늘에 그득히 고이는 푸른 기운. 조선의 하늘에 넘쳐흐르던 푸른 기운을 느끼고 싶어 가끔은 옛 궁궐을 거닐어 본다.

 조선 오백 년을 열고 닫은 경복궁을 찾을 때마다 감회는 새롭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생각할 때면 대왕의 부왕(父王)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떠올릴 때가 더 많다. 태종 이방원이 조선 개국의 주역이라면 민비 역시 역할은 대단하였다. 태종은 청년시절부터 늠름한 기상으로 영웅다운 면모를 과시하며 조선의 산야를 내달은 그였다.

 넓은 견문과 난세를 다스리는 학문에 깊이 침잠하기도 하며 무예를 수련했으며 왕도와 패도에 정통했으며 문장에 능했다. 그는 무인이면서 대과에 장원급제한 경력을 가진 유일한 왕이었다.

 민비 역시 태종에 걸 맞는 헌헌한 여장부였다. 재기가 뛰어났고 자색(姿色)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그들 부부는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지기(知己)였으며 서로 아끼는 정(情)은 남달랐다.

 나는 모처럼 한가한 오월의 아침에 궁궐을 거닐면서 또 한 번 깊은 감회에 젖는다. 그 많은 궁인을 거느리고 대례복 스란치마 끌던 궁궐의 주인은 어디가고 정전도 침전도 비어 있다. 역사의 수레를 타고 떠나고 없는 궁궐의 주인은 바로 일백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선의 황제요, 우리 민생의 어버이인 우리의 군주였다. 오늘 아침 차갑고도 매운 기운 속에서 비어 있는 용상을 올려다본다.

 세상의 영웅을 사람들은 왜 용에 비유하는가.

 태종 임금은 용이었다. 용은 자신의 몸을 키우는가 하면 줄이기도 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숨기기도 한다. 태종의 삶은 난세가 만들어 낸 영웅의 한 생애 바로 용(龍)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태종의 인간학을 읽어냄에 있어서 용을 바다에 놓아 준 생애라 여겨진다.

 용은 나타날 때 승천하는 모습을 보이고 숨을 땐 이슬방울 속에도 들어간다고도 한다. 몸을 키웠을 땐 하늘을 가릴만하고 줄이면 겨자씨보다 작아진다고 하니 그래서 임금이 뜻을 얻어 천하를 누비는 것과 잘도 비교한다.

 아비로서의 혈육의 정을 단호하게 끊어 적장자인 대군 양녕을 패하고 조선의 군주로서 충녕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그 깊은 고뇌와 결단력이야말로 우리 민족과 조선의 국운을 왕성하게 이끌어 세종대왕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의 선택은 정말 거룩하였다. 백성을 내 자식같이 사랑하며 덕치(德治)를 행할 것이라 믿었으며 성군(聖君), 현군(賢君)이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을 가졌기에 셋째 아들인 충녕을 택하였던 왕이었다. 그는 조선의 미래를 내다 본 인물이었다. 만 백성의 군주로서 세종대왕의 부왕으로서 세종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역할을 해 주었던 태종이었다.

 처가가 득세할까 두려워 부원군 민제에게도 벼슬을 주지 않았다. 처남들에게는 아무 권력이 없는 한직에 앉힌 태종이었다. 단지 외척의 세력을 꺾는다는 의미만으로 처가를 권력에서 밀어냈다. 역적으로 몰아붙여 거의 폐문지경으로 몰고 갔다.

 "중전은 항상 내 장자방이구료" 하며 여걸인 민비 덕분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태종이었건만 권력이란 이다지도 비정한 것인가. 장인 민제 역시 태종이 불우했을 때 사위로 맞이해 준 고마운 분이며, 태조 이성계가 등극할 때도, 2번의 왕자의 난에도 한결같이 물심양면으로 가리지 않고 도와준 분이었다. 적지 않는 신세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단호하게 처가의 등용은 배제했다.

 모든 악역은 자신이 다 짊어지고 다음 세대 성군의 시대를 열어갈 터를 닦아 놓았다. 왕도(王道)와 가도(家道)를 어지럽힌 왕자의 난을 벌여 형제와 친지를 죽이고 보위에 오른 태종임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생전에 왕의 자리를 양위하여 세종에게 왕의 수습기간을 두어 왕권을 더욱 확고히 다져 두었기에 조선왕조 오백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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