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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문화원이 생긴 지 벌써 50주년이 된다. 문화원 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장 오래 울산문화원에 관계했던 박영출 초대원장이 생각난다. 지금의 세대가 가고나면 거의 잊혀질 일이지만 중국의 "한 세대가 신작로를 닦으면 또 한세대가 그 길을 간다" 하는 속담처럼 사회의 이치가 모두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의 세대가 닦아놓은 업적도 또 다음 세대가 누릴 테지만 나는 문화원하면 이 진석(眞石) 박영출 선생과 향토사학자 이유수 선생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초

창기 울산문화원을 회고 하면 진석 선생이 집 주인으로 윗채의 안방에 앉은 이였다면 이유수 선생은 알곡이 가득 채워진 창고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향토 문화의 정리·정돈 그리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고이 물려준 사람은 이유수 선생을 뛰어넘은 사람이 없다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닦아 놓은 향토사의 정리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최고의 관직이 울산시청의 과장이었다. 그러나 본연의 업무에 추호의 소홀함이 없이 직분을 충실히 하면서 실로 엄청난 향토사를 발굴 정립하는데 심혈을 쏟았던 울산의 사학자였다. 이런 선생이 생전에 넋두리처럼 늘어놓는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옥교동사무소 부지를 제공한 한 일본인 여성에 대한 사후(死後)의 예우문제였다.

심성이 곱고 여리셨던 선생은 그 여인이 부지를 제공하면서 제사를 지내준다는 구두약속 이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홀로 살게 된 여자에 불과하지만 죽어서 고혼(孤魂) 이라도 면했으면 해서 그것을 전제로 땅을 기부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그 자리는 울산읍사무소를 거쳐서 처음으로 울산시청이 되는 등 울산으로서는 역사적인 곳이었다.

향토인들이 기증을 하고 나서 뒤가 시끄러웠던 학성공원이나 3·1회관에 비한다면 그 일본 여성의 작은 소원이 얼마나 고귀한가? 우리는 그마저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울산의 중심인 시계탑 네거리를 다시 리모델링한다니까 또 생각 나는게 있다. 예총을 창립하다보니 문화원측과 부딪히는 일이 가끔 생기게 되었다. 즉 문화와 예술을 동일시하는 진석선생과의 충돌이었다. 그때는 진석선생에 비해서 필자는 애송이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화원이 예총의 영역까지 다 잠식한다는 이유에서 철없이 굴었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느껴지고 한편으로 후회스러워 지기도 한다.

아무튼 진석 박영출 전 원장은 그런 나에게 선배로서 따뜻이 인정만을 부어 주시고 가셨다. 그러다가 한때는 나를 문화원 이사로 끌어넣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시계탑 네거리에서 전기상을 내고 있었던 선생이 거의 매일 안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순응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얼마 되지 않아서 "구 울산초등학교 정문 가까이에 있는 옛 울산 면사무소 건물을 문화원이 사들이던가 아니면 울산시장님과 협의해서 시의 건물로 해두어야 할 것이니 그것을 꼭 이루어 주십시오" 하고 건의하게 되었다. 그 건물은 현재 태화서원(太和書院) 건물이 되어있다. 박영출 원장은 그 후 그 건물을 사들이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한적이 있었다. 사실 그 후회는 한 시대를 살면서 온갖 궂은 소리를 들어가며 울산의 문화발전에 헌신하시다 가신 박원장만이 후회 할일이 아니었다.


울산의 정체성을 위해서 지금처럼 웅장한 시청건물을 갖게 된 울산광역시가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시립미술관이 지금 자리에 들어서면 그 울산의 역사적인 건물도 가까이 두고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것이 큰 문화도시 울산시가 진짜 문화도시답다는 소리를 듣게 될 일일 것이다. 역사를 간직한 도시는 어느 나라이든지 슬기로운 시민이 살고 있음을 우리는 외국 여행을 통해서 느끼곤 한다. 새로운 시장이 곧 나오게 되지만 그리고 중구가 말 그대로 울산의 종가집이 되려면 오늘의 울산광역시의 탯자리라고 할 수 있는 울산면사무소의 건물을 갈고 다듬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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