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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동네를 나와 번잡한 로터리를 지나고 젊음이 출렁거리는 대학교 앞을 벗어나면 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다. 핸들을 천천히 부산 방향으로 돌려 한참 달리면 사방은 산이 산을 안고 가까이 다가온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오전 햇볕을 쬐고 있는 문수산, 그 품안에 든 '문수사'를 찾는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로 가는 외길로 접어든다. 숲은 어느새 꽃 진자리를 채운 잎사귀가 수런수런 녹음으로 치닫고 있다. 햇살을 머금은 오리나무 잎이 들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자르르하다. 자작나무의 여린 잎사귀가 아기 손만치나 보드랍다. 때늦은 산 벚꽃이 '수우' 솔숲이 내는 염불 소리에 맞춰 몇 안 남은 마지막 꽃잎을 다문다문 띄운다. 잔가지를 흔들며 목청을 고르는 휘파람새, 귀만 열어도 저절로 정신이 맑아지는 박새 소리가 머릿속을 다 채운다. 저만치 시선을 던져놓고 걸음을 멈추고 서면 알 수 없는 기쁨에 설렌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골짜기가 주는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일어서다. 이 한량없는 길 위에서의 가치는 느끼는 사람의 몫이리라. 이걸 느끼지 못한다면 그냥 초라한 이방인에 그치고 말 뿐 일터다. 

 나는 언제나 느낌의 부자다. 소유한 것은 적지만 느껴서 행복해하고 만족하게 되는 감성이 풍요로운 것에 고맙기도 하다. 느낌은 속내를 충만케 하고 내 존재의 가치를 드높여 준다. 문수사를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온갖 나무, 햇살에 반짝이는 잎과 맑은 새소리 같은 길동무가 없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을까. 밋밋하고 심심함에 맥이 빠질 것이다. 걸음은 터덕터덕 산 먼지만 일으키고 말 것이다.

 '문수사'는 산 능선의 절벽 난간위에 지어졌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지어둔 소박한 암자였지만, 지금은 결코 작은 절이 아니다. 어느 대기업 일가가 이곳에서 기도 영험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영험 있는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절로 가는 길가로 솔숲이 우거진 것이 더없이 푸근하다. 정상을 향해 허리를 되감아 오르는 절벽 난간 위 대웅전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을라치면 그대로 순례자가 된 기분이다.
 가다가 멈추고, 다시 발을 옮긴다. 저만치 절벽 큰 바위가 낭떠러지를 만들어 놓고 섰다. 대웅전을 코앞에 두고 마주하는 덩치 큰 '바위보살' 앞이라 엄숙함이 몰려와 다시 손을 모은다. 

 마지막 돌계단을 오른다. 허영허영 숨을 몰아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풀 섶에서 숨어 지내던 보라색 제비꽃이 가는 목을 길게 내밀어 응원이다. 그때 솔가지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은 또 어쩌면 그리도 파랗던지….

 오르막 난간 옆 길가에는 누군가가 소원으로 쌓아올린 작은 돌탑이 군데군데 묵상 중이다. 왠지 자꾸만 그리로 눈이 가진다. 돌탑의 주인은 지금쯤 성불을 이루었을까. 축원과 축사를 하는 심정에 다시 손을 모은다.
 나는 생각한다. 절이란 부처가 있는 도량만이 아니라 가는 길까지 포함 한다고. 그래서 절로 가는 출발부터 순례자의 마음이어야 한다고.

 절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도량으로 여겨지는 마음이듯, 우리네 인생도 과정이 아름다워야 훌륭한 인생이라 말할 수가 있다. 결과만을 말한다면 재미가 없을뿐더러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팍팍해서 건조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종점은 '죽음'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과정을 얼마만큼이나 의미를 두면서 사느냐에 달렸다. 생의 명확한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에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의미를 두고 살 때 아름다운 한평생이 될 것이다.

 나는 절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온갖 것들을 더 좋아한다. 적당히 호흡을 당기거나 늦추며 마음을 열어 서로 교감하고 사색하는 재미에 빠져 걷다보면 바위 같던 마음의 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은 티끌 하나 걸치지 않은 맑음으로 채워진다. 마침내 길 끝 지점 대웅전 법당에서 만난 부처의 미소가 더 반갑고 빛나 보인다.

 행여 다도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더 알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는 과정이 전기 주전자로 막 끓인 물에다 대충 우려 단박에 홀짝 마시고 그냥 일어선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을 끓이고, 비우고, 또 다기를 꺼내서 만지고, 펼치고, 마시고나서 씻고, 거두어들이고 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이 차 맛을 더하지 않은가 말이다.

 문수사로 가는 데는 이 길 말고 자동차를 몰고 절 뒤쪽 입구까지 이르는 방법도 있다. 요즈음 같이 바쁜 세상에 굳이 먼 길을 고집하느냐,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며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로 단숨에 도착하는 방법은 거부한다. 그것은 청춘을 생략하고 노령의 인생길만 누리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학 무지로 청춘을 보내고 죽음 앞에서 사서삼경을 통달한들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다.

 누구든, 종교가 무엇이든, 문수사로 가는 길 위를 걸어가 보라고 권한다. 그저 아무런 부담 없이 열린 마음이면 된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모든 아름다운 풍광과 무언의 교훈을 온전히 그대 것으로 만들어 보시라.

 산문을 들어서는 내 머리위로 대웅전 마당을 비추는 햇살이 행복을 뿌리듯 반짝반짝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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