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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파의 시대다. 현충일 기념사 자리에서도 적폐 청산이 강조될 만큼 우리사회는 과거를 깨고 오늘의 그릇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현충일 기념사에서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적폐들을 바로잡아 안전한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겠다"며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지방선거에서 확인한 민심의 현주소를 같은 온도로 느끼며 스스로 파사현정의 자세로 국정에 임하겠다는 다짐이다.

 파사현정.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이지만 오늘의 언어로 읽으면 적폐청산이다. 울산시장에 당선된 김기현 당선인도 적폐청산의 목소리에  동참했다. 그는 당선 일성으로 공직 기강확립과 과감한 인적 쇄신을 예고했다. 김 당선인은 "공직사회가 경직되고 관습화되면서 관피아가 생겼고, 울산도 그와 같은 문제가 있다면 척결하겠다. 행정은 서비스이지 시민에게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밝혔다.

 당장 공직 사회가 움츠리고 있다. 만만디를 외치며 철밥통을 끼고 있던 공직사회는 적폐청산이라는 네글자의 위용 앞에 혼비백산할 지경이다. 적폐청산에 대한 공직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바로 세종시다. 세종시 사수의 일등공신인 박근혜 정부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속절없이 패배한 것은 다름 아닌 '공무원의 반란'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세종시는 선거 전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여당인 새누리당의 승리를 점치던 곳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곳이기도 해 이번 여당의 패배는 다소 의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문제는 적폐청산의 구호를 치켜든 박근혜 정부가 메스를 들이댄 첫 번째 표적이 공직이라는데 있다. 사실 박 대통령은 틈만나면 공직사회 개혁을 강조했고 세부적으로는 공무원연금 손질과 인사개혁 등 민감한 부분까지 건드렸고 불안감을 느낀 공직사회의 숨은 표가 야당으로 쏠렸다는 이야기다.

 고금을 통털어 새로운 권력의 시작은 언제나 과거와의 결별로 시작된다. 500년 고려왕조를 뒤엎은 이성계의 역성 혁명이 그렇고 박정희 군사정부의 혁명공약이 그랬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내용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그 첫 시작은 과거와의 단절이었다. 실제로 박정희는 쿠데타 성공 직후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를 해산했고,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도록 조치했다. 20년 후 전두환의 군사정부 집권과정도 비슷했다. 전두환은 박정희에 비해 조금 세련된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는 포장에 불과했다.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거창하게 내걸었지만 뒤로는 그의 가신들이 부정축재의 재산을 빼돌리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지금 주말마다 재널을 고정 시키는 드라마 '정도전'은 현재의 적폐청산과 과거의 적폐청산을 고스란히 비교해주는 현장학습장이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정도전은 밀직 부사로서 전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적폐청산에 앞장섰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도전은 전제 개혁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바로 삼봉이었다.

 계민수전(計民授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준다는 뜻이다.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지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서 나온 이 제도는 불평등의 구조적 결함을 바로 잡으려는 통치자의 고민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이상적인 제도다. 치자의 통치원리를 설파한 맹자도 이 문제로 고민했다. 그의 답은 정전제였다. 하지만 맹자의 정전제는 주고받는 원리가 분명해 백성의 체감이득이 적었기 때문에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계민수전이 혹세무민에는 효과적이었다. 바로 왕에 어울리지 않는 자를 왕위에서 내쫓고, 백성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왕조를 바꾸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듯, 권문세족의 소유가 되어 있는 땅들 역시 백성들에게 돌려주자는 구호가 먹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계민수전을 외친 정도전이 실제로 품은 생각 역시 적폐청산이었다. 적폐를 깨고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작업은 나라를 새로 세우는 일과 같다.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실천하려는 의지와 저항 세력의 반발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당장 적폐청산의 깃발이 오르자 밥그릇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리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지 말고 밥그릇부터 깨고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일이 박근혜 정부와 출범하는 지방정부의 숙제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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