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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덕스런 마을이라 해 덕동(德洞)마을이라 불렸다. 경주를 거쳐 사방, 안강, 기계를 타고 흐르는 도로는 완만하고 부드럽다. 한적한 풍경으로 이어진 길 위에서 청송 쪽으로 방향을 틀면 산속에 숨은 듯 안겨있는 덕동마을이 나온다. 3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계곡을 앞에 두고 솔숲 뒤에 자리해 이정표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 용계천 계곡을 거느리고 선 용계정. 대청마루에 앉으면 솔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귀를 적신다.

# 300년 이어온 여강 이씨 집성촌
덕동마을은 조선 선조 때 북평사를 지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임진왜란 때 피란처로 처음 자리를 잡았다. 왜란이 끝나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인 사의당 이 강에게 집 등을 넘겨주었다. 이강은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 이언괄의 4대손으로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진 이곳에 정착해 300여 년간 대를 잇는 여강이씨 집성촌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을은 용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입구부터 소나무가 빽빽하다. 덕동마을 세 곳의 솔숲 중 가장 넓은 1,600여 평의 '송계숲'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딘 나무들은 적당히 구부러지고 솟아올라 한여름에도 연한 먹물빛 그늘을 선사한다. 우측에 최근에 조성된 포항전통문화체험관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 벼랑 위 우뚝선 '용계정'
마을 길을 따라 걷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용계정(龍溪亭·경북 유형문화재 243호)이다. 용계정은 자금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만든 벼랑 위에 우뚝하게 자리해 계곡을 거느리며 선 형국이다. 1546년 조선 명종 때 지어진 누각으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을 5개의 대들보로 받쳤다. 마루 끝에는 난간을 달아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해 운치를 더했고 부연(浮椽-처마 끝에 덧얹어진 짤막한 서까래)과 난간 천장 마루의 기법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름에도 대청마루에 앉으면 차가운 계곡 물에 한풀 꺾인 더위가 주춤해지고 솔숲에 이는 바람이 들어와 절로 시원하다. 


 용계정은 정조 이후 바로 옆에 세덕사(世德祠)라는 서원을 짓고 부속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여강 이씨 집안에서 밤새 세덕사 사이에 담을 쌓아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용계정을 나오면 아름드리 소나무와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웅장하다. 1800년대 초에 심었다는 향나무는 긴 시간을 이기지 못한 듯 옆으로 자라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하늘을 덮은 숲 아래에 서면 아늑하고 고요해 계곡의 물소리만 살아 움직인다.


 용계정을 품은 숲이 '섬솔밭'이다. 도송의 풍광은 용계정 건너편에서 보는 것이 제일이다. 휘고 굽어서 계곡 아래쪽으로 가지를 뻗어 내린 소나무의 운치가 예사롭지 않다.
 한때 땔감이 모자라던 시절, 산중의 나무들까지 남김없이 벌목됐으나, 이곳은 그 수난의 세월을 온전하게 건너왔다. 덕동마을의 솔숲은 여강 이씨 문중의 사당에서 용계천의 물이 내려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기운과 재물이 빠져나간다는 풍수에 따라 물을 가리기 위해 심어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계를 만들어 지금도 관리하고 있다. 솔숲에 딸린 논밭을 매개로 이어온 대동계로 소작에서 나온 소출을 가지고 소나무를 관리하거나 마을잔치에 쓰고 있다. 현재도 나무하나 하나에 관리인의 명패가 붙어있을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다. 나머지 한 곳은 마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솔숲으로 '정계숲'이라 불린다.
 

▲ 300여년의 시간을 통해 우거진 덕동마을 숲. 풍수의 영향으로 재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 마을 숲 아래 펼쳐진 명상의 길
용계정 옆으로 난 소나무 숲길 아래 명상의 길이 열린다. 길 입구에 연못이 자리 잡았다. 호산지당(護山池塘)이다. 산은 강하고 물이 적어서 못을 만드니/동리의 경치가 다시 또 기이하구나/오랜 세월 경영한 뜻을 이루니/장래 남은 경사를 또한 기약하리라.


 본래 1930년대 세워져 20년간 운영된 덕동 사설학당의 운동장이었는데, 수려한 산세에 비해 물이 적어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풍수의 영향으로 수십 년 전 파고, 물을 채웠다. 연못 위에는 연꽃, 부레옥잠들이 자리 잡았고 한편에 노랑어리연꽃이 보석처럼 여름 땡볕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 크지 않는 연못은 오래된 침목으로 깊숙이 데크를 놓아 호기심 많은 사람을 배려했다.


 작은 조약돌로 이어진 길은 서두르지 않고 서성이게 한다. 용계천 물소리와 솔숲에 이는 바람소리, 그리고 가만히 흔들리는 물풀의 움직임까지 느긋하게 즐기며 걷는 데 부족함이 없다.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350년 된 회나무 우물과 덕동 사설학당 시절 구령대 비석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명당의 기운 온화한 '사우정'
명상의 길을 빠져나와 돌담길로 이어진 고샅길을 걷다 보면 담장 아래 피어난 온갖 꽃들이 여름 볕 아래 한창이다.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 분주함의 길옆으로 고색창연한 고택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사우정, 여연당, 애은당 등의 고고한 이름을 가진 집들은 지나온 이력만큼 낡고 빛바랬지만, 그 당당함만은 여전하다.


 농포가 처음 터를 잡고 후일 사의당에게 물려준 집은 현재 이 강의 호를 따 사우정(四友亭·경북 민속자료 81호)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정문부의 조부 정언각이 인근 청송부사로 있을 때 지리에 밝은 이가 일러준 길지로, '활란가거 천하지낙양'(活亂可居 天下之洛陽)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송을곡(松乙谷)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송(松)자가 든 지명에서는 패해 기피한다는 소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피난지로 삼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인 긴 '-'자 형태의 긴 사랑채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사랑채 양쪽을 돌아서야 정면 5칸, 측면 4칸인 '∏' 형태의 본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사랑채가 안채를 호위하는 형국으로 본채는 농포가 지은 것이며 사랑채는 이강이 뒤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랑채는 1m 높이의 축대를 쌓고 세워져 당당한 위용을 자랑한다. 
 사랑채 대청마루 앞에 놓인 나무의자 두 개가 앙증맞다. 슬며시 앉아본 명당의 느낌이 아늑하다. 숲에 가린 물길은 보이지 않았고 마음이 편안하다.
 

▲ 농포선생이 길지라 알려진 곳에 세운 사우정. 손녀사위인 이강에게 양도돼 여강 이씨 집성촌의 토대가 된 곳이다.

# 과거로의 안내 '덕동민속전시관'
용계정 인근에 지어진 덕동민속전시관은 마을이 지금까지 간직해온 2,000여 점의 유물들로 가득하다. 200년이 넘은 사주단자, 마을의 내력을 담은 고문서, 시서화의 대가 표암 강세황이 쓴 세덕사 현판, 1911년 덕동마을을 측량한 도면 등 기록물 400여 점은 방문자를 과거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용계정 천장에서 발견된 세덕사 관련 문건 등은 역사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문건과 함께 문서를 나르던 행랑과 제사 의복 등도 100여 점에 이른다.


 덕동마을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특유의 전통문화를 높이 평가받아 1992년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덕동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계곡을 둘러싸고 형성된 푸른 숲과 연못은 2006년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 2011년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의해 '기록사랑마을'로, 문화재청에서 '명승지 81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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