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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장생포에 내려진 거대한 고래에 온 동네가 들썩인다. 이 시절 고래는 장생포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농담이 돌만큼 풍요의 상징이었다. 포경이 금지되고 수십년이 지났지만 고래관광과 혼획된 고래고기 유통으로 여전히 고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장생포는 그래서 고래와 등가어의 도시이고 '장생포 고래'는 여전히 유효한 고유명사다. 사진=서진길 울산예총 고문 제공

신울산지리지의 첫 답사지는 장생포다. 장생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지명은 아니다. 고지도나 지리지에는 대현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그 하부 마을의 이름 어디쯤에 장생포가 익숙한 지명으로 불려왔던 것으로 전한다. 장생의 어원을 찾아보려고 장생포 구석구석을 누벼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촌로들은 "장생포가 장생포지 뭐할라꼬 따져샀노"하며 면박을 준다. 맞는 말이다. 태풍 나크리가 올라온다는 이야기가 귀신고래 울음소리처럼 들여오던 신새벽, 장생포를 찾았다. 벌써 세 번째다. 지리지의 첫 장을 장생포로 정하면서 너무나 익숙했던 장생포가 낯설어졌다.

고래 없는 장생포는 그렇다. 신화처럼 피어오르는 는개(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가 피워올리는 습기가 여명을 덧칠하지만 저만치 고래잡아 돌아오는 진양호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도 이제 장생포에는 없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이정표와 무수히 늘어선 고래고기집들이 불을 밝히지만 비린내와 섞인 건너편 정유공장들의 기름낀 습기가 오늘의 장생포를 이야기한다.

장생포. 장생은 대체로 장승에서 온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장승은 짐승이나 외경의 대상이었고 과거부터 고래가 출몰했던 흔적이 이곳을 장승개 또는 장생포로 불러왔던 유래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고 보니 장생포에는 유난히 낯선 이름이 많다. 지금은 매립된 죽도에 있던 신주당은 인류사에서 드물게 고래풍어제를 모시던 곳이고 천지먼당과 한개먼당은 전설같은 인간의 바람이 큰 이름으로 액막이를 하던 상징이었다. '고래등 같은 집'이  부자를 상징하듯 고래는 언제나 인간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경물스런 고래를 갈라 고기와 기름을 생계로 이어온 사람들에게 이름 하나, 지명 하나도 상징과 영혼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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