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느릿느릿 내리는 날, 충의사는 젖어 있었다. 목숨을 내놓은 의사들의 위패가 모셔진 제당까지 오르면 왜성과 태화강, 울산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왜성이 발아래 포복자세로 고개를 굽힌 자리, 이곳에 조명연합군은 울산성 전투의 야전사령부를 설치하고 가토의 심장을 겨눴으리라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자리다.
 

▲ 1960년도 학성공원. 국가 문화제 사적 제 419호. 1592년 4월 4일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최후로 퇴각한 곳이다. 사진=서진길 울산예총 고문 제공

 


 그런데말이다. 점심 무렵, 제법 산책길을 나서는 이들이 붐빌만한 주말인데도 충의사는 방문객이 혼자다. 입구에서 만난 관리인 김종하(65)씨는 "어쩌다 일반인들의 방문이 있지만 거의 손님이 없다"고 했다. 행사나 초등학교 숙제용으로 찾는 이들이 고작이라는 부연 설명에 내려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통일신라시대 해양실크로드 출발지로
임진왜란때엔 가장 치열한 전투로 얼룩
의연한 의병활동 등 역사체험 탐방로로


# 반구동일대 고대 울산항 추정
학성은 울산의 오래된 이름이다. 기록에는 지금의 학성동과 복산동 일대로 추정되는 '학성'이 신라 말기에 계변성(戒邊城)으로 부르다가 신학성(神鶴城)으로 개칭했다지만 영물인 학이 이 지명에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특정인물의 신격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바로 그 인물이 박윤웅이다. 옛 사람들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 일대가 '신학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 효공왕 5년에 한 쌍의 학이 울어 이 지역의 사람들이 신학(神鶴)으로 불렀는데 사실은 박윤웅의 출생을 미화하려 했던 스토리텔링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망국의 길을 걷던 신라말, 울산의 호족이었던 박윤웅은 오늘로 치환하면 울산에 기반을 둔 재벌이었다.

 

 

 

 

 

 

▲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산성(울산성) 전투도.

 

 


 지금의 반구동으로부터 아래로 개운포에 이르기까지 울산은 고대 통일신라의 국제무역 통로의 중심이었다.
 울산왜성의 동쪽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울산의 고대 항만시설 유적이 그 증좌다. 한 건설업체가 대규모 아파트를 지어놓은 이 곳은 신라의 대외 교류를 엿볼 수 있는 당(唐)대 중국제 자기(해무리굽 자기) 출토와 항구 배후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는 목책시설(나무울타리)이 확인됐다. 이는 곧 이 일대가 고대 울산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아래로 개운포가 위치했다면 위로는 반구동 항만이 버티고 있던 곳이 울산이었다. 오늘의 국가 주요시설도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보면 고대 국가들도 항만을 수도의 인근에 두고 있었다. 고려는 수도 개경 인근에 벽란도라는 국제항이 있었고 조선 역시 서울 인근에 제물포가 있었다. 항구는 교류의 현장이자 이질적 문화가 혼재하는 다양성의 마당이다.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옛날 사람들의 국제교류는 그 폭이 넓었다. 

 이 같은 증거는 우리보다 오히려 아랍쪽에 그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아랍의 유명한 지도제작자 알 이드리시가 1154년에 그린 지도에 '실라'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고 그 위치 등이 밝혀져 있다. 사라센제국의 전성기에 신라와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신라가 이슬람문화권에 알려졌다는 증거다. 알 이드리시는 교역 당시 이슬람 문화권에 우리나라의 발음대로 알려진 '실라'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왜란에 맞선 의사 227위를 모신 충의사.

 

# 울산~중국~베트남~인도~로마 연결
울산의 국제무역항 흔적은 바로 울산이 로마~중국광주~경주로 이어지는 해양실크로드의 동쪽 끝 또는 신라 최대의 무역항이라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실크로드학자 정수일 박사(전 단국대교수)는 "10세기 전후 모든 해로를 검토하면 한반도 남단~중국 광저우~베트남 동해안~말라카해협~인도~페르시아만~콘스탄티노플~로마로 연결되며, 이 가운데 한반도 남단의 울산은 중요 기항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그 국제무역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박윤웅이 자신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 학성이다. 박윤웅은 신라의 멸망 앞에서 신라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미리 투항할 정도로 세상의 흐름을 미리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은 신라가 멸망한 직후 망국의 수도에 연대해 있었지만 박윤웅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고 학성은 흥례부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가 세워지면서 울산 지역의 행정구역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고려 태조가 울산 지역의 호족장인 박윤웅의 도움을 받아 고려를 건국된 것을 치하하며, 또 지방 호족의 군사적 행동을 막기 위하여 그의 세력 아래 있던 세 현(縣)을 합하여 새로운 행정구역인 흥례부(興禮府)를 만들었다.

# 고려 성종때 위상 급격히 추락
그러나 울산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려 성종때 있었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울산은 지금의 김해 지역인 영동도(嶺東道)의 김주(金州) 공화현(恭化縣)으로 격하되고 별호로 학성(鶴城)을 부여받았다.

 본래 울산 지역은 신라를 거치면서 하곡(굴화 지역)과 동진(강동 지역)을 임관군(경주 모화 지역)이 다스렸고, 동안군(서생 지역)이 우풍(웅촌 지역)을 다스리는 등 분리되어 있었는데 고려가 건국되면서 박윤웅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세 현을 하나로 모으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현재 울산 지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흥례부는 지금의 광역시 형태로 중앙정부를 축소한 향리를 둘 수 있게 하였으며, 이 시기에 거주지별로 성과 본관이 책정되면서 울산 지역의 토성(土姓)은 박, 이, 전, 목, 오, 윤, 임, 문 가(家)로 정리되었다.

 울산이 흥례부로 광역시의 형태를 갖추다가 하루 아침에 공화현으로 위상이 추락한 것은 아마도 정치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추측된다. 유교사회 건설을 통한 왕권강화를 추진한 고려 성종은 당시 토착 세력을 정리하고 지방 호족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짐작컨대 이 당시 지방 호족으로 독자적인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울산은 이같은 중앙정부의 조치에 반발이 가장 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로 그 반발이 울주군의 범서읍 지역을 천민마을인 부곡으로 지정되게 하는 조치로 이어지고 흥례부가 공화현으로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영남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울산광역시 중심부인 학성은 동쪽으로 불국사 구조선을 따라 남류하는 동천강에 의해 북구와 접해있고, 북동쪽으로는 성안천과 시례천을 따라 북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남쪽은 상류에서 구조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주변 소지류와 합쳐 동류하는 직할 하천인 태화강에 의해 남구와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곳에 울산 태화강~학성공원(울산왜성)~학성2공원을 잇는 '학성역사체험 탐방로'가 조성됐다. 총연장 5.7㎞ 구간으로 문화자료(제7호) 울산왜성(학성공원),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고헌(固軒) 박상진 의사 기념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운 울산 지역 의사 227위를 모신 충의사, 포은(圃隱) 정몽주, 회재(晦齋) 이언적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 등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 학성~충의사~구강서원 등 연결
탐방길은 대체로 잘 정비돼 있다. 안내판과 이정표, 전망대 등이 설치돼 찾는 이들이 쉽게 울산의 옛날과 마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울산왜성을 걷다보면 지금도 성벽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고, 충의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운 울산지역 의사와 이름 없이 순절한 무명제공신위(無名諸公神位)를 함께 봉안하고 있어 박상진 의사 기념비와 더불어 애국충절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살아 있는 울산 정신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편집이사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