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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후텁지근해 창문을 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쨍쨍하다. 동네슈퍼 앞에 여자들이 모여서 온갖 수다를 떤다. 큰 소리로 웃을 때는 동네에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부산하다. 요즘에는 비만한 사람들도 많지만, 육체적인 비만보다도 말의 비만을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언어와 육체에 비만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아무리 강조를 해도 모자람이 있는 것이 육체의  비만이다. 먹을거리가 풍족하다 보니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살아 있는 효소가 든 음식을 식단에 자주 올리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집에서부터 기름지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식으로 서서히 입맛이 길들고 있다. 요즘은 어디를 가서 식사를 하더라도 대부분 기름에 튀기고 볶고 지진 것이 많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듯 하던 나의 몸도 지금은 옛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비만해졌다. 웬만하면 청소나 빨래를 하여도 기계의 힘을 빌려 자동으로 하게 된다. 먹는 것은 입맛 따라 먹고 움직이는 것은 소모량이 적게 움직이니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이라도 실천에 옮기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비만'과의 전쟁이다. 어찌 보면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더 신기할 정도다. 육체의 비만이나 말의 비만이나,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도 모자라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육체의 비만도 걱정이고 말의 비만은 겁이 난다. 남의 말도 잘해주면 자신의 인격이 돋보이고, 거칠게 표현하면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필체가 그 사람의 마음이듯, 말은 곧 가치관을 겸한 품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 많은 집에는 장맛이 없다"는 속담처럼 조심을 거듭해도 모자람이 따르는 것이 말이라고 여겨진다. 아무리 재주가 유능해도 물줄기는 엮지 못하고 두뇌가 좋아서 명성을 날려도 한번 한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구업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여러 가지 지은 '업' 중에서 입으로 남을 아프게 하는 것이 첫째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전한다.

 상대방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말이 같아야 한다. 그렇다면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과 같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향기를 지닌 것과 같다. 그렇게만 한다면 누구에게라도 반드시 믿음을 받으리라.

 하지만 상대방이 있을 때는 말이 비단처럼 척척 감기며 인정스럽고 꿀같이 달콤하다가, 그 사람이 없을 때는 익모초처럼 쓴맛을 풍기는 사람을 보았다. 이와 같은 사람이 곧 언어의 비만을 만드는 사람이다. 하나,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고, 덮는다 하여도 오래가지 않는다. 진실은 거짓과는 달라 보이지는 않지만, 무게를 지니고 있어 서서히 알게 된다. 말을 쉽고 가볍게들 하지만 차돌보다 더 무겁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말'은 할수록 부푼 빵처럼 커지고 몸은 움직일수록 비만이 없어진다. 잘못한 말은 음식처럼 먹어 치울 수 없으며, 물건과 달라 감추어 둘 수도 없다. 오물처럼 흐르는 물에 씻을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란 바퀴 달린 자동차보다 더 빠르다. 마치 민들레 씨처럼 사방으로 날아간다.

 언제부터인가 동네 슈퍼 앞에는, 짚단도 놓아두면 서서 걸어 다니고 말뚝도 세워두면 싹이 튼다는 속설이 떠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말이 무섭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길 한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앉아서 온갖 소리가 난무한다.

 달빛은 천지를 비추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얼음은 아무리 부풀어도 제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실속 있는 말은 그다지 시끄럽지도 분주하지도 않다. 살아있는 효소가 몸에 좋듯이, 말이란 거짓이 없어야 살아있는 언어이다. 꾸밈이 없고 진실이 배어있는 말을 한다면 어디를 가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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