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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꾸린다. 이십 년이 넘게 살던 집을 내일이면 떠난다. 하늘도 섭섭한 마음을 아는지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만 결국 눈물비를 뿌려준다. 이사를 한다니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 외롭게 살아가는 분이다.

 문갑을 정리하다가 짧은 몽당연필이 보인다. 보얀 먼지를 솜옷처럼 두르고 댕그랑 하게 문갑 밑에 누웠다. 순간 내 마음에서 아련한 전율이 흘렀다. 사람들도 늙고 쇠약해지면 이 연필처럼 있으나 없으나 별로 아쉬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한때는 저 연필로 기초글쓰기를 배웠다. 연필심에서 먹이 잘 나오지 않으면 입에 침을 발라가며 썼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연필이 귀했다. 비단 연필뿐이었겠는가. 모든 학용품이 다 그랬다. 그때는 왜 그렇게 연필심이 잘 부러졌는지 부뚜막에 앉혀놓은 아기처럼 어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쓰다가 조금 남아 손에 쥐어지지도 않으면 신우대를 잘라서 끼워 썼다.

 요즘 아이들은 믿지도 않을 테지만, 그때는 연필 없이 학교에 오는 친구도 있었다. 대개 말썽꾸러기 남학생들이 빈손으로 와서 남의 연필을 슬쩍 가져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연필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영영 나오지 않았다. 연필을 잃어버리고 가는 날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연필 한 자루에 애태우던 시절이 불과 오륙십 년 전이다.

 연필도 잊힌 존재에 서운함이 있는지 주우려니 얼른 잡히지도 않는다. 연필심이 되기까지 지하 150킬로미터의 속에 있다가 채취된다. 압력과 온도가 극히 높은 맨틀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땅속에서 채취한 흑연과 진흙 물을 빠른 속도로 섞여서 단단해질 때까지 가마솥에서 굽혀 연필심을 만든다. 우리가 쓰기까지 파란만장한 인고의 세월을 겪었을 연필심이 아닌가. 그런데 또 컴컴한 문갑 밑에서 지하갱도에서처럼 어두운 생활을 한 연필이 측은하다. 그도 희망적인 삶과 밝은 미래를 꿈꾸며 태어나지 않았을까.

 내가 젊었을 때는 이 연필도 보드라운 손끝에서 말로도 못할 사연들을 연필심 그가 서슴없이 대변해 주지 않았나. 말로는 못해도 그로 인해 표현할 수 있었고, 밤하늘의 별만큼 수없이 많은 사연을 그로 하여 전할 수 있었다. 사랑의 대변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해준 삶의 선구자가 아닌가. 라디오에 노래만 나오면 연필로 가사를 적어 노래를 익히곤 했다. 지금도 그 노트를 보면 흘려간 나의 젊음이 한 발짝 한 발짝씩 당겨지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그런 연필도 지금은 늙고 병들은 노인처럼 쓸쓸하게 밀려났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도 버려진 존재와 다를 것이 없다. 어느 물건이라도 오래되어 낡아지고 초라해지면 버려지기 일쑤다. 빛이 바래면 뒷전으로 물러나기가 예사다. 물건은 버리고 새로 살 수 있지만,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은가. 어지간히 젊을 때는 찾아오는 사람들에 인해 외롭지 않게 살아간다. 하나, 늙고 병들어 물질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힘이 떨어지면 찾아오는 발길이 줄어드는 것 같다.

 연필을 보는 순간 옆집 할머니가 생각나서 먼지를 털고 자꾸 닦아 본다. 그 할머니 역시 젊을 때는 뼈가 닳도록 일을 하여 부모 봉양 자식 사랑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진 것이 장애인인 아들밖에 없다. 성한 자식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두 번 올 듯 말듯, 지체장애를 지닌 아들과 얼음장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와 같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으니 비껴갈 수가 있겠는가.

 몽당연필을 뱅뱅 돌리면서 깎아본다. 할머니와 이웃으로 살면서 보아왔던 일들이 아련하게 스쳐온다. 짧아진 연필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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