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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끝 글자 조자는 한자로 '복 조'자이다. 가끔 이 복 조자가 한자 사전에 없는 '언니복 조자'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는 언니가 넷 있다. 3, 4년 터울이지만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파마한 뒷모습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실포실하니 닮았다. 또 초승달처럼 미끄러진 눈두덩이를 모두 쌍까풀 수술을 했는데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 닮았다.

 나는 한 마디로 없는 집안에서 공주로 컸다. 순전히 네 명의 언니들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 풍경만 봐도 그렇다. 큰 언니는 그림일기를 그리고, 둘째 언니는 만들기를 하고, 셋째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넷째 언니가 뒤늦은 편지를 쓸 때 나는 두 발 뻗고 잠들면 그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넷째 언니가 가방을 들어주었고, 셋째 언니는  라디오 DJ를 만나고 싶다는 나를 위해 중구 옥교동 청자 다방에 데리고 가 주었다. 부산에서 은행에 다니던 둘째 언니는 국제시장에서 내가 입을 옷을 사다 날랐고, 큰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나를 목욕시키고, 아침마다 머리를 땋아주었다. 내가 어디서 맞고 오는 날이면 언니들이 달려가 몇 배로 갚아주었다. 네 명의 언니들은 오래된 사찰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사천왕처럼 나를 동서남북에서 지켜주었다. 남들 다 있는 오빠가 부럽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딸 중에 가장 키가 크고, 자매들 중 아무에게도 없는 쌍까풀을 달고 나와서는 한 번 들은 노래를 절대 까먹는 일이 없는 막내 동생이 자랑거리였고, 커서는 남들 시집갈 나이에 서울에 공부하러 가서는 덜컥 작가가 되어버린 내가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봄 밤 개구리 소리를 한 편의 서정시라 말하는 큰언니는 동화 소재를 주겠다는 핑계로 옛 추억을 물고 와서는 늦은 밤에 전화를 주기도 하고, '언니 그건 동화 소재로는 별로야' 라고 퇴짜를 놓아도 한 번 꺼낸 옛 추억에 젖어 밤 늦은 줄도 모르는 날이 많았다. 

 어느 새 나이가 들고 보니 형 동생이라는 경계가 흐려져서 간밤 형부와 다툰 일. 자식들 말썽 부린 일로 막내인 내게 눈물바람으로 달려온 날도 있고, 가슴 깊이 묻어둔 고민을 털어놓고 한 바탕 울기도 한다. 

 감사하게도 사는 곳이 지척이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향 마을에 한데 모인다. 봄에는 머위를 꺾고, 쑥을 캐고, 냉이를 캐고 모시잎을 따고, 여름에는 뽕나무를 흔들어 오디를 따고 저수지 둑에서 비수리를 베고, 가을 태풍이 다녀간 논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겨울냉이를 캔다.

 그러다 보니 언니 동생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 모습이 다른 또 다른 내가 되었다.
 환갑이 넘은 큰 언니는 내 모습에서 40대 옛 모습을 보고 가고 나는 언니의 모습에서 먼 뒷날의 내 모습을 미리 본다. 이제는 연로하신 엄마의 자리에 어느새 들어와 앉아 있는 언니들! 

 언니들 덕분에 내 유년이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며, 언니들 덕분에 동화 쓰는 글쟁이기 되었으니 며칠 전 받은 원고료 절반 뚝 떼어 언니들과 9월의 석남사에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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