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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 큰 건물에 큼직하게 쓰인 문구가 붙어있다. 눈의 높이에 맞추어 가르친다는 학습지 이름이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방과 동일하게 적절히 같이 간다는 뜻일 게다. 서로에게 편안한 이미지를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평행선을 맞춘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 높이를 맞추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눈높이의 단어는 붙이면 한 낱말이지만, 띄어서 읽으면 두 개의 낱말이다. 띄어서 읽을 때와는 달리 붙어서 읽으면 그 의미가 다르게 된다. 눈의 생긴 모양이 크나 작으나 사물을 보는 데에는 똑같지 않은가. 눈이 크다고 빨리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늦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사물을 보는 것은 같지만, 눈의 높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돌이켜보니 나처럼 이기적이고 눈높이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 보았던 내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의 눈높이를 재어 보지 않고서 내 욕심대로 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았다. 힘에 버겁도록 몇 학원을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밤늦도록 보냈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잘하는 줄 알았으며, 그것이 당연한 노선인 줄 알았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대리만족을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고 싶어도 못 갔던 길을 아이가 가도록 끈덕지게 유도한 것 같다.

 그러던 몇 해 전 아이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공부만 하려고 태어났나. 힘이 들어 도저히 살 수가 없다며 울며불며 나에게 대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하는 엄마는 아마 세상에 없을 거라고 했다. 아이는 내가 붙들어 매려고 올가미라도 씌우는 것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가서야 뒤통수를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아이를 위해 한 것이  아이는 덫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만 하려고 했지. 가장 핵심적인 아이의 눈과 생각을 맞추지 않았던 것이다.

 몇 달을 두고 내린 결론은 내 욕심이었다. 그래 버리자. 무조건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채우고 또 채워도 넘치지 않고, 넣고 또 넣어도 터지지 않는 욕심 자루를 내가 지닌 것일까. 욕심이란 어디서 어디까지일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그 욕심을 비워내기란 무수한 날을 아파야 했다. 남들은 앞을 전진하는데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행복지수가 점차 낮아지는 예감이 들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자다가 생각해도 숨이 막혀 잠자리를 팽개치고 밖으로 나오기가 예사였다. 다시 아이를 달래며 대화를 해도 내 생각과는 달랐다. 가령 아이는 꽃을 좋아하는데 나는 열매를 좋아하라고 다그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마음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편치 않기 마련이었다. 마음은 버려야지 하면서도 그것이 말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엇을 잡고 있다가 바람에 날려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텅 빈 허공이었다.

 그때 당장은 허탈하고 배신당한 심정만 가득하였다. 차차 여러 날을 지나 마음을 가라앉히며 곰곰이 생각하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생겼다. 봄부터 시작된 갈등은 산도들도 모두 탐심을 내려놓는 계절이 돌아와서야 조금씩 나아졌다. 온 천지를 하얗게 덮은 눈을 보고서야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아이의 입장이 되보곤 했다. 물론 내가 가졌던 뜻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이가 보는 시점에 맞추니 서로가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알기에는 몸과 마음이 많이 설레발이를 친 뒤였다. 

 그래서 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눈높이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오래전부터 내걸린 눈높이라는 단어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인제 와서야 글자가 눈에 쏙 들어오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햇볕에 반사되어 천진한 아이들의 눈처럼 반짝거린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마음에 와 닿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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