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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된 후, 울산은 한국의 중추적인 산업도시가 됐다. 이때부터 울산에는 타 지역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울산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그들의 2세는 울산이 고향이 되었다.

 결국 그들 모두가 울산이라는 그릇에 담긴 물이 된 것이다. 물은 어디든지 흐를 수 있지만 담겨있는 그릇대로 그 모양을 가진다. 그러한 울산은 어떠한 곳인가. 그동안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바빠서 이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울산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 누군가는 울산의 정신을 처용을 의미하는 관용과 용서에서 찾았다. 갖다 붙일 수야 있겠지만 잘못하면 견강부회로 비칠 수 있다. 필자는 울산의 정신을 '문·무·예·상', 이 넉 자에 담을 수 있다고 본다.

 상(商),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잡았다.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를 잡는 울산사람들이 보인다. 울산의 고래잡이는 현대사에서도 이어졌는데 1982년 7월 국제포경위원회에서 고래를 보호하기위해 상업포경금지를 내려 1985년 11월부터 포경업을 금지했다. 거센 파도와 고래잡이 포경포의 발사, 고래의 몸통에 작살을 던지는 어부의 모습은 삶을 살아가는 강인한 울산 사람들의 모습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 풍속편에 '호상고(好商賈 상업과 장사를 좋아한다)'하는 울산 사람의 생활력을 보여준다. 이는 고래가 있는 해양과 산업도시를 이끄는 기업적 도전정신으로 이어진다.

 무(武), 조선 초부터 약467년 동안 낙동강 동쪽의 경상좌도 지역을 방어하는 병마절도사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 울산이다. 병영 출신인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인 광무11년(1907)까지 군대가 주둔되었으며 1907년에 군대 해산식을 가졌다. 경상좌도병영성은 울산 남쪽 동래부 기장에서 언양을 지나 현 7번 국도를 따라 경주로 거쳐 간다. 아직도 울산 중구에 병영이 있다. 그리고 울산 개운포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의 영성이 있는 해군 성터가 있다. 개운포는 조선 효종7년(1656)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군함을 만들고 정박한 곳으로 선수마을이 있다. 이를 보면 울산은 육군사령부와 해군사령부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그러므로 울산의 읍지인 학성지(영조25년, 1749)의 풍속편에 울산사람은 '무(武)를 숭상한다'고 했다. 즉 울산은 무술과 스포츠의 도시이다.

 문(文),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으로 효종10년(1659)에 사림 55인이 공동출자하여 숙종4년(1678)에 구강서원이 울산 반구동에 세워져 약 200년 동안 강학과 향사를 봉행하다가 고종8년(1871)에 철거됐다. 서원은 강학, 교화, 예례의 기능으로 조선시대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200년 동안 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가 있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실이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과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이 울산이 고향이라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울산이 학문을 할 수 있는 성품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학성지(1749) 풍속편에 '울산사람은 성품이 강하고 굳세어 학문을 받아들이기가 쉽다'고 했다. 이는 학문을 배우는 기반으로 성품이 굳세고 강직하고 바르게 행함을 할 수 있는 선비정신으로 세계적인 교육도시 울산이다.

 예(藝), 울산에는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예술적 성품을 가진 울산사람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암각화의 수많은 그림들, 그리고 신라시대의 처용탈춤, 그리고 신라오기의 곡예와 가면극을 이은 울산서낭당각시를 모시고 유랑 연행한 울산 도화골의 울산죽광대, 마두희, 매귀악, 연날리기인 연등신,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유물로 출토되고 있다. 특히 울산 중구는 1907년까지 병영에 조선군사가 주둔한 군사문화 구역이다. 그곳에서 연희를 담당한 군나 및 지원 인원은 학성지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악공(樂工) 악생보(樂生保) 29명. 약부(藥夫) 56명, 의율생(醫律生) 서원(書員) 모두 7명 관노비 50명 이내(노(奴) 20명, 비(婢) 30명)로 약 142명 정도다. 대규모 연행이 가능하며, 또 군사용품을 제작했다. 1907년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산되고, 병장구를 만드는 장인들은 담뱃대나 은장도를 만들어 생활했으며, 병영과 도화골에 주둔했던 군나인 죽광대는 동제인 도화골 서낭당의 신격인 울산서낭당각시인형을 모시고 곡예와 탈춤 그리고 잡희를 연희하며 유랑연행을 하며 생활하였다. 이러한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탈 그림, 신라 처용탈춤, 그리고 죽광대의 곡예와 탈춤이 있는 연희의 고장이다. 즉 연극, 무용, 음악, 노래, 그림과 조각 등이 어울려 있는 복합예술 도시이다.

 조선 중종25년(1530)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풍속 편에 울산사람들의 성품을 잘 나타내었다. 울산사람은 "무술과 예술을 숭상하고, 사업과 장사를 좋아한다. 그리고 품성이 강직하고 곧아서 학문을 이루고 배우며 교화하기 쉽다"라고 했다. 즉 '문·무·예·상'의 정신으로, 이것은 그 동안 울산사람들이 지켜왔던 품성이고 미래지향적인 울산의 정신이다. 이로써 울산은 문화, 예술, 스포츠, 상업과 기업이 부흥하여 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도시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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